기득권과 학벌주의
기득권과 학벌주의
  • 김종은 기자
  • 승인 2020.07.14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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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득층 자녀가 서울권 대학에 쏠리는 현상이 심각하다는 내용의 기사를 봤다. 국가장학금의 지급 비율이 낮은 상위 7개 대학의 목록은 소위 알려진 최상위권 대학의 그것과 같았다. 즉, 상위권 대학에 진학한 학생일수록 가정의 소득수준이 높다는 말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기득권이라는 단어와 자신 사이에 선을 긋는 것 같다. 비유하자면 너는 금수저고, 나는 흙수저는 아니어도 기껏해야 동수저 수준이니 기득권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득권이란 단순히 사회의 상위층에 위치한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는다. 밥 한 끼에 십만 원이 넘는 가격을 지불하고 자가용에 전용 기사를 둔 사람들만이 기득권이 아니다. 권력은 관계 속에 존재한다. 즉, 내가 특정 대상보다 사회적으로 우위에 차지하고 있다고 여긴다면 나는 그 대상에게 이미 기득권이다.
우리는 학력을 통한 줄 세우기에 익숙해져 있다. 12년의 기본 교육과정을 거치며 셀 수 없이 많은 띠지를 받고, 그 위에 적힌 일련의 숫자들로 평가받아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대학교는 다르다. 우리는 12년간의 성적표로 학업 능력을 인정받아 고등 교육 기관인 대학에서 특정 수준의 강의와 시설을 제공받고 누리는 만큼 보다 나은 능력을 갖출 것을 자신에게 기대해야지, 그 이상의 보상을 사회로부터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를 구분하지 못해 전설처럼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마음에 드는 이성의 번호를 얻기 위해 제 학생증을 마패처럼 들이밀었다거나, 학벌주의가 심해졌으면 좋겠다는 당황스러운 주장들을 읽다 보면 내가 대학을 왔는지 인생의 모든 고민을 해결해줄 로또에 당첨됐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등산하는 사람은 위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듯 경쟁주의 사회에서는 항상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게 된다.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파질 때면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수도 있고, 나보다 좋은 조건의 강인한 폐와 다리를 가진 그들을 질투할 수도 있다.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은 늘 약자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어떤 회사의 CEO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여유로운 가정형편과 든든한 부모님의 지원 덕분이라는 말은 쉽게 믿으면서도, 수 없는 실패를 넘어 그저 열심히 했더니 여기까지 왔다는 말은 불신한다. 그러나 우리가 위치한 자리가 자신의 노력과 피땀, 눈물만으로 엮어낸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외면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선택을 책임져야 한다고 배운다. 반면 학벌주의란, 자신의 선택이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주장하며 보상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물론 올바른 선택지라는 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은 똑같은 시험지가 주어진 채로 치러지는 오지선다형의 시험이 아니다. 누군가는 시험지 위에 희미하게 보이는 번호를 따라 답을 적으면 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백지 위에 무슨 문제를 줬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답을 적어야 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답안을 적을 종이조차 주어지지도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대학 합격증은 내 발언권을 키워주겠다는 보장도, 근거도 없는 주장의 설득력을 높여주겠다는 보장도 아니다. 합격증과 졸업장에 연연하며 미래를 향한 문의 크기를 더 키워 달라 요구하기보다는 직접 문을 열고 걸어갈 당신의 용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