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과 교수 사이
선생과 교수 사이
  • 권창규 / 인문 대우조교수
  • 승인 2020.02.13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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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는 공식적인 내 직함이다. 강의실에서 1학년 학생들을 많이 만나는데, 내게 선생님이라고 했다가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교수님으로 고쳐 부르는 경우가 왕왕 있다. 마치 선생님은 고등학교 교사에 대한 호칭이고, 교수를 대학 선생님에 대한 호칭으로 여기는 듯하다. 학생 시절에 나는 교수들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나뿐만이 아니고 주변 모두가 그랬고 지금도 은사님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나는 1990년대 후반에 학부를 다녔는데 언젠가부터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더 많이 쓰이고 있었다. 10여 년도 더 된 일인가. 공과 대학에서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고 인문사회 대학도 비슷하게 변해왔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뭔가 낮춰 부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소비자나 타인에 대한 호칭이 흔히 선생님으로 통용되니 더 값어치 없이 느껴지는 탓도 있다. 대한민국 사람 중 청년기를 지난 대부분이 흔히 선생님, 아니면 사장님으로 호명된다.
그런데 교수님과 선생님은 어떤가? 따져보면, 교수와 선생은 다른 범주의 명명이므로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 교수는 직위이고 선생은 호칭이다. 따라서 중학교 교사도 선생님이 되고 대학교수도 선생님이 된다. 10여 년 전 일본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때가 있었는데, 결석했던 학생에게서 ‘권창규 선생’으로 시작하는 결석계를 받은 적이 있다. ‘아니, 어디다 대고 선생이야, 선생이.’라며 처음에는 괘씸했다. 알고 보니 일본어 ‘先生(센세)’에는 존칭이 내재해 있어 한국어처럼 따로 높임의 접미사인 ‘님’을 쓰지 않는다. 한국어에서도 ‘소파 방정환 선생’과 같은 호칭에서처럼 해당 명명에는 존경의 함의가 있다.
생각건대 학생에게 교수님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상하다. 교수나 교사는 직위이며 호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교사님이라고는 하지 않는데 교수님이라고는 한다), 나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직급이 호명될 이유가 없다. 교수는 지식과 경험의 선학이자 선생으로서 강의실에 서는 것이지 직장 상사로 서는 게 아니니까.
선생님 대신 교수님이라는 호명이 일반화되는 현상은 징후적이다. 학생과 교수의 관계가 학점과 강의료를 교환하는 행정적 관계이자 시장적 구조에 그치는 것은 아닌가. 의심과 불안, 애석함이 커진다. 그렇다고 학생들에게 교수님 대신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종용할 수도 없는 것이, 선생 노릇을 해야지 선생님이라고 불릴 테니 말이다.
대학에서 ‘교수님’만 있고 ‘선생님’이 사라지는 현상은 언어 용례에 그치는 작은 일이 아니다. 선생님이 많아지는 대학은 배울 이유가 있고 존재 가치가 있는 곳일 터이다. 대학은 기업화·상업화로의 질주 대신에 고등교육 기관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애초에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기관과 사회 영역까지 이윤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을 신자유주의화의 현상으로 일갈한다면, 대학도 신자유주의화의 기조에 속해있다. 한국의 대학도 비슷하다.
학령인구 감소를 대비해 수년 전부터 계속된 대학의 구조 조정은 돈 안 되는 곳을 겨냥해왔다. 취업이 어려운 인문사회계, 예술대학, 기초과학이 그 타깃이 되었다. 학교의 규모와 지역을 보자면 중소 규모의 지방 대학이 위험하다. 학생이 없으면 학교가 문을 닫아야 한다는 건 합리적인 이치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팔리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시장의 원리와 같아지기 때문이다. 고등교육의 영역이 시장 원리로만 돌아간다면 큰 공부를 가리키는 대학(大學)의 명명도, 역할도 무색해진다.
구조적 문제로만 대학의 퇴락을 변명할 수는 없다. 대학의 구성원으로서 교수들이 할 일도 있고 교육자로서 할 일도 남아있다. 학점밖에 기대하지 않는 학생들을 제외한 나머지 많은 학생들에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본다. 전문적 지식이나 기능적·실용적 지식을 충분히 잘 전달하는 것 이외에도 사회와 공동체, 타자와 관계할 수 있는 통합적, 비판적 지식과 기술을 꾀하는 일, 그리고 자기 탐색과 같은 인생의 긴 숙제를 열어주는 일이 있다. 그래서 충분히 재능 있고 유능한 이곳의 학생들이 잘나가는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 괜찮은 인간으로 성장해가면 좋겠다. 이건 학생들에 대한 바램이자 내 지향이기도 하다. 2020년 다시 봄이 온다. 곧 무은재기념관 앞에 산수유가 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