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리의 무지개
장사리의 무지개
  • 노승욱 / 인문 대우부교수
  • 승인 2020.01.05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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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아들의 태권도 승품 심사가 있었던 초겨울의 토요일, 아들을 응원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승품·승단 심사가 열렸던 영덕으로 가면서 장사리 해변을 지났는데,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2019년 9월 개봉)이 떠올랐다. 흐린 날씨에 비까지 내리는 장사리 해변의 파도는 제법 거세 보였다. 심사장에서는 아이들이 멋진 품새를 선보였고, 겨루기에서도 실력을 뽐냈다. 기합을 넣으면서 자유 대련을 펼치는 어린 무도인들을 보다가, 문득 장사리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어린 학도병들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당시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됐던 국군 학도병들의 평균 연령은 16~17세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장사리에서 북한 인민군과 펼쳤을 힘겨루기는 과연 어떠했을까?
장사상륙작전은 6·25 전쟁 초기에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펼쳐진 일종의 위장작전이었다. 그런데, 영화에서 보면 매기(Maggie, Megan Fox 분)라는 종군기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그녀는 도쿄의 기자들은 인천상륙작전을 ‘다 아는 작전’으로 부른다고 말한다. 그만큼 인천상륙작전의 노출 위험성이 컸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적을 교란하기 위한 성동격서 전술의 일환으로 장사상륙작전이 실행된 것이다. 약 보름간의 군사 훈련만을 받은 채 문산호(LST-120)에 승선해 장사상륙작전에 나섰던 국군 제1 독립유격대대 772명의 학도병과 지원 요원 56명은 맹렬하게 싸우다가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 당했다. 육군본부에서는 장사상륙작전에 참가한 유격대원들을 우국청년(의사)으로 호칭했다고 하는데, 이 전투가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7년 3월 6일, 장사리 바닷가에서 상륙작전 중 좌초됐던 문산호가 발견되면서부터였다.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은 1950년 9월 15일 새벽에 펼쳐졌던 장사상륙작전의 현장으로 역사의 기억을 소환한다. 이 영화는 한국 전쟁의 신화적 전투인 인천상륙작전 그늘에 가려져 있던 장사상륙작전의 스토리텔링에 주목했다. 당시에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을 5천분의 1로 보았다고 하는데, 장사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은 아마 5만분의 1이지 않았을까 싶다. 상륙작전일에 태풍 ‘케지아(Kezia)’의 영향으로 인해 문산호가 좌초됨으로써 상륙작전은 시작하면서부터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 5시 반에 대대장 이명흠 대위는 상륙 명령을 하달했는데, 4~5m의 파도가 치는 바다에 뛰어든 학도병들은 해변까지 50여m를 헤엄쳐 가야 했다. 그들은 해발 200m 고지에서 내뿜는 북한군 2군단 예하 101보안부대의 기관총 세례를 온몸으로 맞서야 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천상륙작전이나 장사상륙작전은 북한군의 남침 후 열세에 몰렸던 국군과 유엔군의 전황을 일시에 뒤바꿔준 기념비적인 전투였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승전의 기쁨 속에 잊기 쉬운 ‘슬픈 이야기’도 들려준다. 슬픈 이야기는 피난 중에 가족을 모두 잃은 북한 출신 학도병 분대장 최성필(최민호 분)을 매개로 전개된다. 그는 전투 중에 토치카에 있던 인민군을 사살하게 되는데, “엄마”를 연거푸 부르면서 숨진 인민군에게서 꼬깃꼬깃 접혀있던 손편지를 발견한다. 그 편지에는 임시소집일에 학교에 갔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혀 강제로 인민군에 입대하게 된 경기고 학생, 상우(배준모 분)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사연이 적혀있다. “여태껏 제가 쏜 총탄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잘못됐을까요. 전 지금 인민군복 속에 학교 교복을 입고 있습니다. 행여 우리 국군을 만나게 되면 전 인민군이 아닌 경기고 학생이다 말하려구요.” 결국 상우는 인민군이었지만, 인민군이 아니었던 셈이다. 동족상잔의 전쟁은 이렇듯 모순적인 정체성을 지닌 인물을 만들어 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인민군복 차림으로 위장하고 민가에 갔던 성필은 인민군으로 참전한 사촌 동생 재필과 반갑게 조우한다. 그런데, 포로 이송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교전으로 인해 재필이 죽고 만다. 성필과 재필은 겉으로는 적이었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혈족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모순적인 전쟁으로 인해 모호한 경계 위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던 남북한의 소년들을 미시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영덕에서 포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시간을 내서 장사리 해변에 들렀다. 장사리 해안에는 ‘작전명 174호’,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했던 국군 학도병들을 기리기 위한 전승기념공원이 조성돼 있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멈추는가 싶었는데, 장사리 해안에 영롱한 무지개가 떠올랐다. 구약성서에서 무지개는 대홍수 이후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신의 약속이 담긴 언약의 표징이다. 장사리의 무지개를 보면서 다시는 이 땅에서 동족상쟁의 비극이 재연돼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바람을 마음속에 담았다. 아름다운 무지개 속에서 잊어서는 안 될 영웅들의 이야기가 파도 소리와 함께 전해지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