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과 걸쇠
호박과 걸쇠
  • 박경민 박사 / 기초과학연구원 복잡계 자기조립연구단
  • 승인 2019.10.18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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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을 알아본다
분자가 짝을 알아보고 선택적으로 결합할 수 있을까? 얼핏 지능이 없는 분자가 스스로 짝을 알아본다고 하니 신기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단백질, DNA 등 수많은 생체 분자들이 지금도 우리 몸속에서 이런 신기한 일을 아주 정확하게 스스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그 원리가 무척이나 궁금하다. 이 원리는 분자가 서로를 알아보는 현상인 분자인지(Molecular Recognition), 그리고 이를 통해 자발적으로 형성된 분자 집합체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인 초분자 화학(Supramolecular Chemistry)을 통해서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초분자 화학은 1987년, 2016년 두 번에 걸쳐 노벨화학상이 수여된 연구 분야이다. 그만큼 중요하고 흥미로운 화학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학문이다. 일반적으로 분자인지 연구는 인공 분자 쌍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단순화한 환경에서 수행해 왔다. 이는 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 원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대부분의 경우 약한 상호작용으로 인해 복잡한 환경에서는 거의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응용하기는 쉽지 않다. 세포같이 다양한 생(生)분자가 혼재하는 복잡한 환경에서도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는 생분자들의 상호작용(예를 들어, 효소-기질, 항원-항체)과 비교한다면 아직도 인공 분자를 이용한 분자인지와 이 특성을 활용하기 위해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박같이 생긴 바구니 분자
기초과학연구원 복잡계자기조립연구단(단장 김기문)은 쿠커비투릴(Cucurbituril)이라는 분자를 이용한 초분자 화학과 이를 활용한 응용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쿠커비투릴은 글리코루릴(Glycoluril)이 포름알데하이드와 반응해 생성된 화합물로 속이 빈 호박 모양을 하고 있다. 1990년대 초 김기문(화학) 교수가 이 화합물을 이용해 분자인지 및 자기조립(Self-assembly)에 관한 연구를 할 때만 해도, 6조각의 글리코루릴로 이뤄진 쿠커비투릴(CB[6])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왜 오직 6조각으로 이뤄진 쿠커비투릴만 존재하는가?”라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김 교수팀은 여러 가지 다양한 조건에서 쿠커비투릴 합성을 시도해 봤다. 무수한 실패와 좌절 끝에 마침내 김 교수팀은 6조각 이외에도 5, 7, 8조각으로 이뤄진 쿠커비투릴 동족체(CB[n], n=5, 6, 7, 8)가 존재한다는 것을 세계 최초로 발견하고, 이를 각각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림 1). 또한, 동공의 크기가 다른 동족체들은 그 크기에 따라 각각 특정 손님 분자를 선택적으로 탐지할 수 있는 바구니 분자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이는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200여 개의 연구 그룹들이 쿠커비투릴을 이용한 초분자 화학 및 응용 연구에 뛰어들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림 1. 쿠커비투릴 동족체들의 구조와 쿠커비투릴을 이용한 주인-손님 분자 상호작용 모식도
▲그림 1. 쿠커비투릴 동족체들의 구조와 쿠커비투릴을 이용한 주인-손님 분자 상호작용 모식도

자연을 넘어선 인공
김 교수팀은 여러 동족체 중에서도 7조각의 단위체로 만들어진 쿠커비투릴(CB[7])이 페로센(FA) 혹은 아다만탄(AD)이라는 손님 분자를 선택적으로, 그리고 아주 강하게 인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일련의 연구를 통해 이 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현재까지 알려진 어떤 인공 분자 결합 쌍보다 강력하며, 심지어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분자 결합 쌍으로 알려진 단백질-비타민 결합 쌍, 스트렙타비딘-바이오틴보다도 세다는 것과 복잡한 생체 환경에서도 작동한다는 것도 밝혔다. 이 발견을 계기로 우리 연구단은 원하는 두 분자를 인위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초분자 걸쇠(Supramolecular Latch) 시스템을 고안하고, 이를 생물학, 생의학과와 융합 연구로 확장해 세포나 동물 이미징, 단백질 분리와 동정에 유용한 기술로 발전시켰다(그림 2).

▲그림 2. 초분자 걸쇠 개념도와 이를 이용한 생물학, 생의학 응용 모식도
▲그림 2. 초분자 걸쇠 개념도와 이를 이용한 생물학, 생의학 응용 모식도

 호박 분자 이용한 단백질 이미징 및 분리
유전공학 기법을 이용하면, 세포 내의 원하는 단백질에 FA나 AD 분자를 도입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이 손님 분자를 선택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CB[7]이 연결된 형광 분자를 처리해, 이 단백질만을 이미징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인공 분자 쌍의 상호작용이 세포에 존재하는 내재성(endogenous) 생분자들에 영향을 받지 않아, 살아 있는 세포에 존재하는 단백질을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다. 이미징뿐만 아니라, CB[7]이 도입된 비드(CB[7]-beads)를 이용해 손님 분자가 도입된 단백질들을 선택적으로, 효율 높게 분리할 수도 있다. 이미징과 마찬가지로 내재성 생물질로 인한 오염을 최소화할 수 있으며, 작은 크기의 인공 주인 분자가 높은 밀도로 비드에 도입돼 있어 많은 양의 목표 단백질을 효율적으로 분리하는 것도 가능하다.

자연과 인공 시스템 접목한 단백질학
초분자 걸쇠 시스템은 분자 수준에서의 강력한 상호작용 측면에서 기존의 생물질 결합 쌍 시스템과 비슷한 특성을 보인다. 하지만 그 결합 원리는 생물질 결합 쌍의 원리와 완전히 달라, 두 시스템을 동시에 사용하더라도 분자 쌍들은 서로의 분자인지 특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런 직교성(orthogonality) 분자인지 특성을 이용해, 우리 연구단은 세포 안의 특정 지역에 존재하는 단백질을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두 종류의 분자 쌍 시스템을 동일 세포에 적용해 서로 다른 단백질을 분리하고, 이를 동정해 얻은 정보를 교차 분석함으로써 기존에는 얻기 힘들었던 단백질의 생물학적 정보를 제공하려 한다. 예를 들어, 관찰하고자 하는 세포 소기관들이 접하고 있는 지역에 존재하는 단백질들을 분석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그림 3). 이런 연구는 기존의 방법으로는 관찰하기 어려웠던 세포 소기관 접점에 존재하며 세포소기관 사이의 소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백질을 분석하고, 그 기능을 규명하는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림 3. 쿠커비투릴을 이용한 초분자 걸쇠와 생물질 기반의 분자 쌍 시스템을 이용한 세포 소기관  접촉 지역에 존재하는 단백질 분석법 모식도
▲그림 3. 쿠커비투릴을 이용한 초분자 걸쇠와 생물질 기반의 분자 쌍 시스템을 이용한 세포 소기관 접촉 지역에 존재하는 단백질 분석법 모식도

마치며
30여 년 전 우리대학에서 시작된 쿠커비투릴 연구를 통해 우리는 가장 우수한 인공 분자 결합 쌍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원하는 분자를 연결할 수 있는 초분자 걸쇠와 같은 잠재력이 높은 응용 기술도 제안할 수 있었다. 쿠커비투릴 연구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 다양한 응용이 시도되고 있으며, 우리대학은 쿠커비투릴 연구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학문과의 융복합 연구를 통해 점차 인류에 도움이 되는 혁신적인 신기술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