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형 한 우물이 필요할 때
자립형 한 우물이 필요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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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9.2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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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의 무역 제재로 시작된 양국 간 분쟁으로 인해, 국가 연구 개발과 관련해 상당한 이슈가 발생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5일 일본의 조치에 대한 근본적 대책으로 ‘소재, 부품, 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을 발표했고 앞으로 7년간 관련 연구 개발에 7조 8천억 원을 투자해 일본 의전도가 높은 100대 품목에 대해서는 수입국 다변화, 해외 기술기업 인수합병 등을 통해 공급 안전성을 조기 확보하는데 주력하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분쟁의 시작으로 소재의 탈 일본화, 국산화를 외치며 관련된 많은 연구과제가 쏟아져 나왔고, 그 대부분은 연구비 규모가 큰 연구 과제들인 데 비해 기간은 2~3년 정도로 짧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거라면 진작 했을 것이라는 것이 각계의 반응이다.
필자 또한 연구에 사용하고 있는 많은 장비 및 소재들이 일본산이다. 수억을 호가하는 장비를 구매하며 가장 크게 고려하는 점은 역시 안정성인데 국산 장비보다 일본산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는 그 이유가 때로는 속상하고 뼈아프다. 소재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연구실에서 사용하는 많은 화학약품, 고분자 재료, 반도체 공정에 들어가는 리소그래피 시약들은 대부분 일본산이다. 초정밀 영역(수 나노~수십 나노)에서는 국산 소재들로 실험한 결과에서보다 일본산 소재에서의 결과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다. 그 때문에 현재로서는 국산 장비와 소재들로만 연구를 진행하기 어렵다. 촉박한 시간 안에 연구 결과를 내야 하다 보니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더 빠르고 안전한 결과를 줄 수 있는 일본산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초고순도 소재를 사용하는 분야에서 국산 소재를 사용하지 못한 대기업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당장 급하기 때문에 일본의 소재들을 제3국을 통해서 우회해서 수입하는 방안을 취하고 있고, 일부 타사의 제품을 사용하거나 국산 제품을 사용해 생산에 차질이 없도록 한다고는 하나, 극소량의 불순물로도 공정 전체가 실패할 수 있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단기간에 이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되었을까? 필자는 그 이유 중 하나로 일본의 한 우물을 팔 수 있는 연구 환경을 꼽는다. 우리나라에서 한 우물을 파는 연구의 어려움은 연구개발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 한 연구자가 대학원생일 때부터 연구자가 되어 은퇴할 때까지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연구자는 새로운 것에 도전할 필요성도 있지만, 분야에 따라서는 더 깊이 있는 연구로 그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가 가능하도록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5년에서 10년 길게는 30년 이상 연구비를 지원받는다. 그러한 일본의 연구 환경은 연구자에게 몇십 년이 축적된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갖게 하고 그 결과는 때때로 노벨상에까지 이른다. 일본이 가진 원천소재들의 막대한 기술과 힘은 연구의 한 우물에 의한 결과일 것이다. 일본이 작금의 수출 규제를 통해 우리를 괴롭히며 그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집요함에 무섭게 치를 떨기도 하지만 과학기술에서 보여주는 일본의 집요함, 한 우물 파기는 지금 일본이 우리나라를 향해 부리는 치기의 근본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지난 50년간 전 세계 유례가 없을 정도의 성공을 거둔 한국의 경제성장 발전 모델인 추격자(fast follower)를 벗어나 세계를 이끌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수 있는 선구자(pioneer)로 가기 위한 디딤돌로 이번 위기를 기회 삼아야 한다. 개별 연구자의 자세와 마음가짐뿐만 아니라 제도적 시스템의 변화는 물론이고 장기적인 소재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해 정부와 기업, 연구소와 학교가 모두 하나 돼 그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 정치적인 상황이나 대내외 경제 이슈로 인한 주먹구구식으로 문제 해결을 하고자 하는 근시안적인 정책, 그리고 짧은 연구과제 주기로 인해 안전하고 쉬운 결과로 보여주기식 연구를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연구 환경을 벗어나 한 우물을 파는 연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지지해 다시 한번 세계로 도약하는 대한민국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