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 ‘현수’들의 고민거리 잔혹사
현대사회 ‘현수’들의 고민거리 잔혹사
  • 정대영 / 인문 조교수
  • 승인 2019.04.24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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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 하고 싶은 거 해.”
2004년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분식집 주인(김부선 분)이 고등학생 현수(권상우 분)에게 하는 대사이다. 헛웃음을 짓게 하는 이 장면은 이후 많은 패러디를 낳았다. 나이 차이 크게 나는 성인이 미성년자를 유혹하는 외설적 상황은 왜 헛웃음을 나게 할까? 저 대사는 마치 자유를 권유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대상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 주길 권고한다. 분식집 주인은 사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현수가 선택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때문에 저 대사는 외설적이기 이전에 역설적이고 그것을 느낀 우리는 헛웃음을 웃는다.
현대사회의 젊은이들은 현수와 같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주저한다. “왜 그래…” 그런 현수에게 분식집 주인은 짜증스럽게 묻는다. 분식집 주인은 기성세대다. 주저하는 젊은이들이 한심하다. 마음대로 되지 않아 짜증이 난다. 하고 싶은 거 하라면서 짜증을 내는 기성세대의 반응이 젊은이들을 더 혼란스럽게 한다.
현대사회의 현수들은 피곤하다. “정치나 사회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이기적면서도, 개인의 삶에서의 포기도 빠르다”라며 비판받는다. 기성세대의 비판이 다가 아니다. 흔들리고 혼란스러운 현수는 자기 비관에 빠진다. 비판과 비관은 현수를 피곤하게 하고, 이렇게 피곤한 현수는 포기하고 싶다. 현수는 자신을, 그리고 관계를 포기하고 싶다.
현대사회의 현수들 탓이 아니다. 사회는 급속도로 복잡해지고 있다. 거대 담론과 이념을 벗 삼아 ‘치열했다 자부하는 이들’의 자녀 세대는 넘쳐나는 규범과 정치적 정당성(Political Correctness) 속에서 ‘고민할 주제’ 조차 골라내기 어려운 상황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부모들이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를 돌려 읽고 토론을 즐긴 데 반해, 자녀 세대는 유시민의 ‘쓸데없는 잡학’이 재밌기도 하지만 동시에 버겁다. 넘쳐나는 규범, 상호 배반의 ‘그러해야 함’은 현대사회의 현수들에게 물음표만 잔뜩 던져 준다. 현수들은 이 상황이 너무 고달프다.
현수들이 못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현대사회의 현수들은 그 어느 세대보다 정치적으로 더 정당한 삶을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큰 집단에 소속되어 정치투쟁을 하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작은 집단 속에서 그리고 개인의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해 가고 있다. 특히나 이념의 시대에 그늘 속에 있어야만 했던 약자와 소수자들의 삶과 인권을 대하는 데 있어, 그 영역의 최전선인 일상에서, 그 어느 세대보다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한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그들의 가치판단을 ‘일베’ 아니면 ‘메갈’이라 평가해버리기 일쑤고, 이것이 현수들을 피곤하게 한다.
피곤한 현수들은 편안함을 갈구한다. 이질적인 것을 멀리하고 동질적인 것을 찾아간다. 동질적인 것을 찾고 동질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자기표현보다 모방을 유도한다. SNS에서 소통 방식의 변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페이스북에서 ‘자신의 상태(Status)’에 ‘좋아요’를 얻기 위해 사진과 글을 올려야 했던 이들은, 글 쓰고 읽기에 무상함을 느끼고 인스타그램으로 자리를 옮겨 ‘매력적인 사물 사진(음식이나 경치)’을 공유하며 하트를 갈구한다. 때문에 인스타그램의 사진 아래에는 글이 없거나 숨겨져 있다: #첫줄 생략. 매력적인 사물 찾기에도 피로해진 이들은 틱톡으로 자리를 옮겨 ‘같은 음악에 같은 춤’을 찍어 올린다. 짧은 영상 아래에는 어김없이 같은 해시태그가 달린다: #유행 #추천. 모방을 통해 동질성을 인정받는 ‘편안한’ 동질의 세계. 이곳에 다다른 현수들은 돌연 본질의 상실을 느낀다. 나와 같은 이들을 찾고 싶었지만, 그곳에는 내가 없다. 그럼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옳음’에 대한 강요가 현수들을 방황하게 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면서도 ‘맞는’ 답을 찾아  살기를 바라는 기성세대들의 기대는 현수에게는 너무 버거운 짐이다. 넘쳐나는 규범, 이러면 일베 저러면 메갈이 되는 이 사회 속에서, 나를 정제하기는커녕 무엇하나 결정하기 버거운 현수들은 동질적 ‘남’을 찾으려다 모방적 ‘나’만 마주하게 된다. 결국 시작은 옳음에 대한 강요, 옳은 길을 찾아야 한다는 역설적 강요였다.
현수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누군가 ‘옳은 길’을 알았다면 이미 알려줬을 것이다. 똑똑한 현수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설명하려는 이들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옳은 길’은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무슨 길이든 다 옳은 길일 수 있고 무슨 선택이든 다 맞는 선택일 수 있다. 틀림이 두려울 필요가 없다. ‘틀림’은 없고 ‘다름’만 있다. 다름의 불편함은 우리를 성장시킨다. 다름의 불편 속에서 내가 발견되고, 남과 구분이 된다. ‘내’가 나이기 위해 하는 이질적 행동이 ‘우리’에게 당장 불편함을 줄지는 모르지만, 불편이 없으면 ‘내’가 없고 ‘너’가 없으며 궁극적으로 ‘우리’의 모습이 완성되지 않는다. 내가 나로 너에게 다가가고, 네가 너로 나에게 다가옴을 온전히 맞아들일 때, 비로소 둘은 우리가 된다. ‘틀림’의 피곤을 벗고 ‘다름’의 불편을 입자. 그래서 말한다.
“현수 하고 싶은 거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