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문제와 부딪치며 해결방법 배운 소중한 기회
끊임없이 문제와 부딪치며 해결방법 배운 소중한 기회
  • 김요한 / 전자 04
  • 승인 1970.01.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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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신문 ‘프레시안’ 인턴기자 체험기
나는 아버지의 권유로 지난 8월 한 달 간 프레시안이라는 인터넷신문에서 인턴 기자로 일하게 되었다.

프레시안은 원래 인턴 기자를 뽑지 않는다. 따라서 인턴 기자가 들어와도 월급을 줄 리 만무하다. 그런데 신문방송학과도 아닌 공학도가, 돈도 한 푼 받지 못하는데 한 달 간 다른 기자와 같이 출퇴근하며 일하겠다니, 그분들이 의아해하면서도 나를 당돌하게 생각하신 게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난 이런 일을 할 기회를 얻은 것조차 행운이라고 여겼고, 그래서 월급이 없는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그 시간에 과외를 했으면 족히 몇 백만원을 벌었겠지만,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고 내 미래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감히 포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린 결정들 중 가장 현명하고 탁월한 것 중 하나라는 것을 나는 지금도 잘 알고 있다.

첫날에는 미리 연락드린 박인규 대표님과 간단한 얘기를 나누었고, 박 대표님께서 직접 다른 기자 선배들을 일일이 소개시켜 주셨다. 여러 선배들이 외근 중이셨고, 한 분은 6자회담이 열리고 있던 터라 베이징에 가셔서 내가 그 책상을 잠깐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를 한 달 동안 지도해주실 ‘멘토(mentor)’는 연세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과학·환경전문기자로 활동하시는 강양구 선배였다. 강 선배는 나에게 여기서 기자를 하기 위해 가장 먼저 써야 하는 글이 있다면서, 자기소개서를 쓰라는 첫 번째 숙제를 내주셨다. ‘자신이 기자가 되어 첫 기사를 쓴다고 생각하고, 쓰라는 강 선배의 말씀이었다. 형식은 자유이지만, 명색이 기자인데 기업 면접 볼 때 제출하는 딱딱한 글과는 달리, ‘김 요 한 기자’에 대한 ‘가상 인터뷰’라든가, ‘인물 기사’ 형식이 좋지 않겠냐고 하셨다. 나는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중심으로 멋지게 쓰려 했지만, 나중에 강 선배의 지적을 받고 나니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기자가 되는 게 쉬운 게 아니구나’라고 느낀 첫 번째 순간이었고, 난 한 달 간 이 생각을 기사 쓸 때마다 수십 번도 더 했다. 자신이 쓴 기사를 편집국에 송고하는 방법은 인터넷 신문 기자가 배우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나는 프레시안 관리자 모드로 들어가서 기사를 올리고 송고하는 방법을 두째 날 배웠다. 종이신문은 그렇지 않겠지만 인터넷 신문 편집국에서는 내가 다른 기자 선배의 출고 전 기사를 볼 수 있는데, 나의 자기소개서도 모든 사람이 읽어볼 수 있게 편집국에 송고했다. 인터넷 신문은 종이신문과 달라서 어떤 사건에 대한 기사를 실시간으로 올릴 수 있다. 이는 인터넷 신문이 종이신문과 차별화 될 수 있는 가장 큰 강점이기도 하지만 때론 오보를 낳기도 한다.

셋째 날부터는 사회부·정치부 선배와 같이 여러 취재현장을 따라다녔다. 난 겨우 학부 2학년이고, 기자 일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 내가 처음에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기자회견 내용을 메모하고, 사건 현장(꼭 어떤 범죄 현장만이 아니다)을 스케치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종이신문의 경우 신입 기자가 되면 가장 먼저 가는 부서가 사회부이며, 경찰서 등지를 돌며 사건·사고를 취재하는 사회부 기자를 6개월 정도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첫째 주말에는 편집장님께서 내게 <나는 고발한다>라는 책의 서평을 한 번 써 보라고 말씀하셨다. ‘드레퓌스 사건’의 전말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와 관련된 에밀 졸라의 편지인 <나는 고발한다>라는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나는 최대한 노력해서 서평을 써 갔지만 그 글은 결국 실리지 않았다. 아마 시간을 아무리 많이 줬어도 그 글은 실리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에 기초하여 쓰는 사건 기사와는 달리 서평은 글쓴이의 지적 수준과 역량이 더 잘 드러나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 많이 부족했던 것이다.

한 달이 그리 긴 기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취재하러 갔던 곳이 꽤 많았다. 국회만 해도 각종 학술토론회, 정책토론회 등을 포함해서 서너 번은 갔었고, 시민단체나 그 외 여러 기관 및 단체에서 기자회견을 할 수 있는 한국프레스센터, 국가인권위원회 주관 토론회,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청계천 시공 현장, 국보법 위반 한총련 수배자에 대한 사면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던 한국기독교회관, 본프레레 전 한국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의 마지막 경기인 사우디전이 열렸던 상암경기장, 8.15때 극우보수단체의 집회가 열렸던 서울역 광장 등등 하나하나가 다 값진 경험이라 할 수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나의 기사는 ‘평양냉면의 으뜸 장인, 타계하다’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였다. 냉면에 관한 한 ‘서울시내 4대 천왕’의 한 사람으로 꼽히던, 평양냉면집 ‘을밀대’(乙密臺)의 주인 고 김인주 씨의 ‘장인 정신’을 집중적으로 다뤘는데, 고인의 가업을 물려받은 장남 김영길 씨를 신촌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에서 인터뷰하여 기사를 쓸 수 있었다. 고발 기사나 정치 관련 기사를 쓰는 것도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필요하겠지만 이런 훈훈한 기사를 쓸수 있다면 더 보람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도 들었다.

내겐 첫 번째 사회 생활인 ‘인턴 기자’를 한 달 간 하면서 배우고 느낀 것은 단순히 기사를 쓰는 방법이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기자는 항상 긴장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고, 이것은 비단 기자에만 국한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문제에 부딧친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면, 사회생활의 절반은 성공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은 기자의 일상이지만 축복이기도 하다. 나는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는 내 또래의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부터 ‘좌파 노무현 정권’의 퇴진과 국보법 존치를 주장하는 극우 보수단체의 어른들까지 만나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가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배운 점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이다. 내가 미숙한 대학생임을 알면서도 나를 학생이 아닌 신입 기자로 보아 주시고, 여러모로 조언하고 격려해주신 선배님들께 이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우리학교 학생들 중 대부분은 아직 장래를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학과에 입학함에 따라 자신의 직업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약간의 불안함을 수반하는데, 아마도 내가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하려는 것도 그런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 대해 걱정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선택 가능항이 더 많고, 훨씬 더 많은 기회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나는 내 생각을 넓힐 수 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기회는 찾아서 도전하는 자의 몫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