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문화 진단-4.놀이문화] 젊음과 열정 반영된 생산적인 놀이문화 찾기
[대학문화 진단-4.놀이문화] 젊음과 열정 반영된 생산적인 놀이문화 찾기
  • 김혜리 기자
  • 승인 2000.05.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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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표출 내지는 발산의 방법으로 놀이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오래 전부터 문화의 한 영역으로 자리잡아왔다. 대학생활을 크게 공부와 놀이로 나눈다고 할 때 우리의 놀이 현실이 어떠한지, 어떤 형태의 문화로 거듭나야 하는지 고민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편집자 주


놀이는 보통 우리들에게 진지함과는 반대의 개념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놀이가 진지한 것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공부하는 시간 외에 이루어지는 취미생활, 여가생활을 포함한 갖가지 놀이를 대학문화의 일부분으로 뭉뚱거렸을 때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진지하지 않은 놀이에 진지한 물음을 던져보자.

사이버 공간에서 표류하는 대학군상

컴퓨터 보유 환경이 뛰어난 우리 학교에서는 놀이도 대개 컴퓨터 앞에서 이루어진다. 채팅, 게임, 음악감상, 영화감상을 비롯해 편지 주고받기, 물품 구입까지 컴퓨터로 해결하는 요즈음 사이버 공간은 어쩌면 현실보다 더 친숙한 공간일 것이다.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ID는 또다른 여러 명의 나를 컴퓨터 안에 가두고 활보하게 한다.

우리 학교 놀이문화라면 랜이 잘 깔린 기숙사 방안에서 밤새 게임을 즐기는 것을 우선 떠올리게 된다. 눈이 퀭해지도록 게임을 하다보면 생활 패턴에 무리를 가하게 되는 경우도 많고 실제 이 때문에 학사경고를 받는 학생도 적지 않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 상의 놀이는 사람들 간의 대화를 단절시키고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몰아갈 위험이 크다는 데 문제가 있다. 또 무절제한 사이버 표류는 말초적인 재미를 추구하려는 경향을 낳게 될 수도 있다.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간에 자료를 송수신 또는 공유할 수 있으며 컴퓨터 작은 화면에서 많은 세상과 사람을 접할 수 있는 엄청난 혜택 뒤에는 사실 현실에 대한 적응력을 상실할 수도 있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학교 학생에게는 특히 사이버 공간과 현실 사이의 적당한 선을 지킬 수 있는 절제가 필요하다.

공동체 놀이문화의 현주소, 대동제

그나마 닫혀진 혼자의 영역에서 뛰쳐나와 모두가 어우려져 함께 같은 놀이와 흥겨움을 공유하자는 ‘대동제’의 모습에서 개인 아닌 공동체의 놀이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며칠 전 사흘간의 해맞이 한마당이 막을 내렸지만 학생들 아닌 외부사람들로 그나마 썰렁한 교정을 채웠던 우리의 축제는 아쉬운 끝맛을 남기며 금새 뇌리에서 잊혀진다. ‘일탈’과 ‘화합’이라는 의미를 찾아보고자 했으나 이미 화합의 장으로써의 축제의 존재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진정한 축제가 되기 위한 필수 요건인 ‘참여’의 부족 때문이다.

대학의 공동체 놀이문화의 집합체인 축제. 여기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탓하기 앞서 사람들을 끌 수 있는 공동체 놀이 문화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는 점이 먼저 지적되어야 한다. 축제 뿐 아니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MT도 구성원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외면당하고 있는 이유로 놀이문화 기획력의 부족을 탓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 내 여러 행사를 주관, 담당한 경험이 많은 이영록(산업 3) 학우는 “행사를 만들면서도 가끔은 ‘누가 재밌어서 이걸 할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며 “학생들 나름의 노력이 꾸준하게 계속된다면 앞으로 많은 발전이 있겠지만 현재는 사회 전반적 분위기가 침체돼 있음은 물론 그런 노력이나 성과가 부족했다.”라고 말했다.

학생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대동제는 사라지고 흥청거리는 주점만이 살아남아 축제의 이름을 유지하는 것은 ‘일탈’을 꿈꾸는 우리에게 기성문화의 답습이라는 족쇄만 채운다.

우리의 개성이 녹아있어 하나의 고유명사화 된 우리만의 축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성과 진지한 문화탐색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 반성 안에는 분명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재미’라는 측면과 기성문화와 차별화하여 대학의 문화로 자리잡기 위한 순수한 ‘비판정신’이 포함되어야 한다.

창조의 바탕이 되지 못하는 동아리

또다른 공동체 놀이 문화의 한 축이자 개인으로써도 놀이를 한껏 즐길 수 있는 것이 바로 동아리이다. 대학 내의 만남의 주축이자 공통된 재미를 추구하는 공간으로 존재함으로써 동아리는 대학의 놀이 문화의 집거지가 된다. 각 분야를 공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거대한 토대가 대학의 동아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단지 친목 도모회로써 갈 곳 없는 학생들을 받아주는 곳만이 아닌데도 그저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등록하고 가끔 얼굴이나 내미는 곳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임에는 반도 안 되는 인원만이 나오기 일쑤고 사이버 공간 상에서야 대화가 이루어진다. 이런 식으로 재미를 만끽하기 위한 토론이나 세미나가 줄어들면서 대학의 ‘사회에의 창조적 기여’라는 면이 도태되어 가고 있다. 재미에 대한 애착과 공동체 의식을 함께 하려는 노력, 그리고 스스로 문화를 창조하려는 적극성이 없다면 동아리의 정체성을 찾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능동적으로 표출하는 놀이로 재미 즐기기

놀이는 보통 비정치적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 놀이와 시대상황을 같이 놓고 살펴본다면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 금세 눈에 띈다. 즉, 놀이문화는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정치적 상황에 대항하는 형태의 놀이로써 축제가 진행되고 음악 감상실, 카페, 당구장 등 공동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놀이문화가 지배적이었다. 그에 반해 지금의 놀이는 자신의 흥미영역을 찾아 개별적으로 즐기는 성격이 강하다.

이렇게 본다면 개인적 영역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학교의 놀이문화는 학내 분위기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개인주의의 틀에 갇혀 다른 사람과 그 재미를 공유하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고 혼자의 시간을 만끽하는 추세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시대의 추세처럼 놀이가 일에까지 연결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좋아하는 것을 즐기며 일하는 ‘프리랜서’나 게임을 주직업으로 하는 ‘프로 게이머’가 등장하는 현실이지만, 우리에게는 일과 놀이가 대체로 잘 구분되어 행해지는 것 같다. 이것을 잘 들여다보면 놀이는 그저 잠시 몸을 쉬이고 일에서 얻지 못한 쾌락을 느끼기 위한 수단으로써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놀이하는 인간>에서 J. Huizinga는 ‘놀이의 마지막 요소인 ‘재미’는 어떠한 분석도 어떤 논리적 해석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놀이는 분명 재밌어야 하고 능동적인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통집에서 술을 마시고 연못으로 달려가 헤엄을 치며 ‘산공다이’를 목청껏 부르는 것도 좋다. 당구장에서 밤새 큐대를 잡고 시간을 보내며 만화삼매경에 빠지는 것도 나름의 놀이로 인정하자. 다만 이것들이 그저 시간 때우기에 불과한 아무 생각없는 놀이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면 한번 생각해 보자.

소모적이고 일회성에 그치는 놀이 대신 젊음과 열정이 반영된 놀이를 즐길 줄 아는 지혜를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