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기술을 통한 정치 실험: 가상국가로서 비트네이션
블록체인 기술을 통한 정치 실험: 가상국가로서 비트네이션
  • 정채연 / 인문 대우조교수
  • 승인 2019.03.29 16: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6년 11월, 국민주권과 민주주의의 회복을 염원하는 광장에서의 열기가 한창 뜨거웠던 즈음, 미래사회를 구상하는 한 콘퍼런스에서 한국의 촛불시위 현장을 담은 스크린을 배경으로 한 여성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이미 주어진 국가에서만 살겠습니까, 아니면 직접 당신의 국가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최초의 가상국가인 비트네이션의 설립자, 수잔 타르코프스키 템펠호프는 전통적인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기술적 실현 가능성을 역설하는 야심 찬 발제를 열정적으로 이어나갔다.
탈중심적인 국경 없는 자발적 국가(Decentralized Borderless Voluntary Nation; DBVN)를 천명하는 비트네이션은 2014년 7월에 설립됐다. 나아가 2016년에 이르러서는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스마트 계약 기능을 구현하는 오픈소스 플랫폼인 이더리움과의 협약을 통해 헌법을 공포하는 등, 실질적인 국가의 지위를 갖춘 가상국가의 실현을 예고하고 있다. 세계 어느 곳에 있든 이름과 이메일 정도의 정보만 제공하면 누구나 비트네이션의 시민이 돼 비트네이션에서 제공하는 행정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시민들이 탈 영토적인 온라인 공간에서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자신들에게 효력 있는 법의 내용을 만들고 행정 서비스를 받으며 분쟁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가상국가는 국민국가의 고유한 임무로 여겨졌던 사회보험 및 각종 복지정책 등을 포함한 상당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은 바로 탈중심화에 있다. 비트네이션은 이런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해 분산화된 탈중심적인 거버넌스를 실현하고자 한다. 블록체인 기술은 중앙집권화된 정부 기구가 아닌 시민들의 자발적인 인증을 통해, 공인된 신분 및 효력 있는 법적 관계의 증명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한다. 이를 통해 국가의 관리 아래에만 놓여있었던 △출생 △혼인 △유언 △법인 설립 △부동산 등기 △각종 계약 등에 대한 공증이 비트네이션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예컨대 세계 최초로 블록체인에 혼인관계가 등록되고 최초의 블록체인 여권 역시 발행된 바 있다. 블록체인을 통한 기록의 관리는 암호화돼 참여자들에게 분산돼 저장되기 때문에, 독점적인 정보 관리 및 조작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보다 투명하고 안전하며 민주적인 탈중심적 거버넌스를 가능하게 한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맥락에서 특히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는 가상국가는 시민의 주권행사와 민주주의의 강화라는 맥락에서 정당화되기도 한다. 시민들 간의 민주적 합의에 근거하는 법과 정책을 제공하는 데 있어 기존의 대의민주주의가 갖는 한계점을 비판하면서, 개별 시민들에게 자신이 속하고자 하는 정치공동체와 거버넌스 형태 및 정부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요청은 가상국가 논의의 사상적 기초가 돼 왔다고 할 수 있다. 비트네이션은 누구든지 자발적으로 자신만의 국가를 창설할 수 있는 오픈소스 국가 모델을 제공하는 플랫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블록체인 기반 DIY 거버넌스 서비스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적 개인들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거버넌스의 내용 및 형태를 자유롭게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 동의 여부에 따라 옵트인·옵트아웃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직접민주주의에 가까운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평가할 수 있다.
나아가 비트네이션은 특히 세계주의적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게 해석될 수도 있다. 실제 비트네이션은 △극우 민족주의 진영의 선전 △난민 위기 △브렉시트와 같이 세계주의의 지향점과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세계 시민적 저항의 맥락에서 새로이 조명받았다. 예컨대 비트네이션은 난민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으로서 비트네이션 난민 긴급 대응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이는 난민에게 블록체인 긴급 신분증과 비트코인 데빗카드를 제공해, 실질적인 무국적자인 난민이 물리적으로 자신의 법적 지위를 증명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런 조치를 그 어느 국민국가보다도 앞서서 마련한 해당 프로그램은 2017년 유네스코의 넷엑스플로 포럼에서 수상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비트네이션과 같은 가상국가가 기존의 국민국가를 대체할지, 국제사회에서 독립적인 국가로 혹은 대안적인 국가로 승인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아직 분명한 답을 내릴 수는 없다. 다만 △대의민주주의의 한계 △확장된 정부 권한과 중앙집권화된 정부 권력에 대한 경계 △국가의 완고한 국경 및 국적·시민권 개념이 가져오는 문제 등 현대사회에서 국민국가의 ‘국가로서의 한계’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이끌어오는 데 충분한 논의의 장을 마련해주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비트네이션 시민권을 취득한 비트네이션 시민은 2017년 말 기준 대략 1만 명에 이른다. 오늘날 국민국가가 가지는 한계를 적절하게 지적하고 세계주의적 지향점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중요한 성찰적 동인으로서 이런 새로운 현상을 바라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