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재영 기자
  • 승인 2019.01.05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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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향기가 좋다고들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아니다.

어릴 적 숲에만 들어서면 코를 찌르는 풀 향은 울렁거렸고, 그 향기롭다는 장미 향은 숨이 막혔다. 피톤치드가 나온다는 편백 베개의 향은 기침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이걸 향기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대체 무엇이, 어디가 좋은 것일까.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풀 향기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된 건 불과 얼마 전이다. 잔디 깎기가 한창인 가을날 폭풍의 언덕을 가로질러 봤는가? 냄새가 지독하다. 잔디가 베어지며 수액이 흘러나온 탓이다. 끔찍했다. 발밑의 잔디들은 처참하게 목이 베어진 채 꼿꼿이 서 있었고, 베어진 머리는 그 옆에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고흐의 말이 떠올랐다. “난 밀밭에서 죽음을 봤어. 그들이 베어내는 것이 인류라면 어떨까” 보이지 않는 피로 얼룩진 폭풍의 언덕을 걸으며 생각했다. 이 향 어디서 많이 맡았는데. 풀 향이다. 그제야 풀 향기의 정체를 알게 됐다. 그건 죽음의 향이다. 우리가 좋다며 산길로 뛰어 들어갈 때 발밑의 이름 모를 풀과 곤충들이 내지르는 하나의 비명이다. 나무들이 눈물 대신 수액을 흘리며 부르는 장송곡이다. 꺾인 꽃다발의 향기가 슬픈 이유다.

당신은 풀 향기를 좋아하는가? 다시 말하지만 나는 아니다. 아마 평생 좋아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정체를 깨닫고 나니 풀 향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처참한 폭풍의 언덕을 가로지르며 계속 생각했다. 풀 향은 본질적으로 죽음의 향이다. 그런데 왜 살아 있는 식물에서도 죽음의 향이 풍기는 것일까. 생이란 죽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해, 죽음이란 생명의 압축이다. 죽음은 생명의 부재라고만 생각해 왔던 가치관이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죽음을 갈망하는 사람 중에서는 사실 그 누구보다 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고들 한다. 풀 향이 누군가에게 향기로울 수 있는 이유, 사의 찬미가 종종 생의 찬미로 해석되는 이유, 허무주의자가 일생을 살아가는 이유도 모두 비슷하지 않을까.

폭풍의 언덕 위 하늘은 넓어 볕이 훤히 든다. 문득 본 하늘은 그날 유달리 맑았다. 밀밭에서 죽음을 봤다는 고흐의 말 뒷부분이 생각났다. “그래도 슬프지는 않아. 황금빛 태양이 찬란하게 비춰 주는 죽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