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 서 있는 나란 실존
죽음 앞에 서 있는 나란 실존
  • 박건 / 생명 17
  • 승인 2018.11.0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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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끝나가던 2017년 12월 31일, 나는 장례식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작은할아버지께서 암으로 건강이 좋지 못하셨는데, 이번 겨울에 감기에 걸리셔서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친척들은 이미 와 있었고, 나는 조문을 하고 친척들과 둘러앉았다. 때가 되어 입관식을 하는 시간이 됐다. 사실 나는 이때까지 입관식에 참여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이날 처음으로 죽은 사람을 실제로 봤다. 옆에서 작은할머니와 그의 아들딸은 오열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은 소중한 사람이 죽는 것이었다. 죽음 앞에서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가 비참할 뿐이었다.


사람은 죽는다. 이것만큼 자명한 진실은 없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왕이나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들이나, 평범하게 살았던 사람들이나 비참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 모두 죽었다. 또한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도 언젠가는 죽는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걸어가는 삶이다. 나는 그날 장례식장에서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실감했다. 항상 지금의 모습처럼 살아갈 것 같지만 나도 늙어 쇠약해지고, 숨이 끊어질 것이다. 어쩌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 우리는 사는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죽음이라는 것, 즉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한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실존을 어떻게 완성해 가는가에 대한 문제와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실존은 삶의 선택의 순간에서 스스로 결단하는 주체를 가리킨다. 나란 실존은 제한된 인생에서 무엇을 결단할 것인가? 실존주의 근대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실존의 3단계를 제시한다. 첫 단계는 감각 단계이다. 이 상태에서 실존은 쾌락을 추구하며 충동적이다. 끊임없이 다양한 쾌락을 느끼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쾌락 이상에 무언가가 있다는 불안을 느낀다. 쾌락 이상의 것을 선택한 주체는 다음 단계인 윤리 단계에 도달한다.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의 삶에 규율을 적용하고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자신이 계속 수행하느냐,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야 하느냐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다음 단계는 신앙 단계이다. 그때 주체는 온전한 주체성을 가진 완전한 실존인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에서 말하는 전지전능하고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을 완전한 실존으로 보았다. 따라서 주체는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진정한 실존이 된다.


키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를 보면 자신이 어떻게 지금의 실존 단계에 도달하게 됐는지 되돌아보게 해준다. 키르케고르의 생각에서 중요한 것은 불안인데, 실존의 불안이 어떤 단계에서 자신이 머물 것인지를 결정한다. 만약 자신이 쾌락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불안을 가지지 않을 것이니 1단계에 머물 것이고, 2단계에서 자신의 윤리적 수준이 탁월하다고 생각한다면 2단계에서 머물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3단계에 있게 될 것이다. 나는 묻고 싶다. 자신을 죽음 앞에 세워 놓고, 당신은 어떤 단계에 있는 사람인가?


우리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에 진지하게 자신을 대입해보고, 자신의 인생을 꾸며 갈 필요가 있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 서게 될 텐데, 그때 불안한 삶을 살았다고 후회한들 돌이킬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자신의 단계가 어떤 단계이든 그 선택에 불안이 없을 때, 비로소 그 삶은 스스로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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