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6호 ‘웰 다잉, 품위있는 죽음을 준비하다’를 읽고
제396호 ‘웰 다잉, 품위있는 죽음을 준비하다’를 읽고
  • 이민경 / 신소재 15
  • 승인 2018.05.30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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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죽음에 대해 생각했던 기억은 유치원생 때였다. 소중하게 생각했던 햄스터들의 죽음 이후, 집을 혼자 보게 된 적이 있다. 부엌을 보면서 엄마가 내 곁에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고민했었던 것 같다. 어렸을 적, 죽음이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뉴스와 주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접하면서, 죽음이란 예정 없이 찾아오는 것임을 깨닫고,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포항공대신문을 읽다가 ‘웰 다잉’이라는 제목에 흥미를 갖고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웰’과 ‘품위’라는 제목 속 단어를 통해 기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는가에 대해 다룰 것이라고 유추했다. 그래서 도대체 첫 기사 속 연명의료결정법의 ‘연명’이란 것이 어떻게 ‘웰’이나 ‘품위’와 연결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과거와 비교하면 의료기술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이에 따라 사람의 평균 수명은 늘어났다. 대신, 기사 내용과 같이 우리나라 한해 사망자 중 75%가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 전 마지막 기억은 새하얀 병원 침대에서 창밖을 통해 보이는 풍경과 병원에 있는 환자들이 된다. 나는 병원에서의 죽음이 ‘품위’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기사를 끝까지 읽어봤다. 왜 단락의 소제목이 ‘우리나라에서 잘 죽는다는 것’인지 마지막 단락에서 알 수 있었다. 기사는 우리나라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는 연명 치료를 거부해도 환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의료행위가 일어나고 있음을 상기시켜줬다. 그나마 올해부터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서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준비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에 위안을 가져봤다.

‘생전 장례식’은 기사를 통해 처음 접했다. 종활(終活)에는 상속 및 유언과 관련된 활동이 전부라고 생각했었는데 새로운 ‘웰 다잉’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생전이라도 ‘장례식’은 죽음과 상당히 가까워져 있는 시기에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이다.

마지막 기사에서 최근 임종체험이나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웰 다잉’을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음을 알려줬다. 나 또한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교외캠프에서 임종체험을 해본 적이 있다. 관 속에 누워있기도 하고 유언서를 작성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활동이 나에게 ‘웰 다잉’이 어떠한 형태일지 생각할 기회를 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람들은 종활을 죽음 직전에 준비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기사 속에서 대다수 노인들이 죽음을 준비하는 반면, 전체 국민 대상의 ‘죽음에 대한 인식 조사’에서 과반수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준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대답한 것이 이를 변증한다. 기사 마지막의 톨스토이의 격언처럼 죽음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죽음은 준비할 수 있는 무언가다. 임종 때가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우울한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높여주고 인생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웰 다잉’은 일단 무병(無病)이다. 나는 건강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고, 이는 죽음 직전에 준비한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은 하고 싶은 것이 많고, 죽음 외에 신경 쓸 일들이 많아서 매시간 죽음을 되뇌고 있진 않지만, 꾸준히 죽음을 준비하고 나만의 ‘웰 다잉’을 찾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