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노벨상과 한국 사회] 노벨평화상 수상은 현실문제 해결의 끝 아닌 또다른 시작
[시론-노벨상과 한국 사회] 노벨평화상 수상은 현실문제 해결의 끝 아닌 또다른 시작
  • 이제훈 / 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 승인 2000.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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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던 날, 나는 평양에 있었다(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와 남쪽 평화참관단의 평양 체류일정 등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김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소식은 평양 옥류관에서 들었다. 남쪽 평화참관단의 환송연회가 시작되기 전, 취재진 가운데 서울과 전화통화를 한 이가 전해주었다. 남쪽 사람들은 귀엣말로 전파된 이 소식을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북녘 사람들도 몇몇은 남쪽 사람들에게 들어서 알게 됐다. 결국 이 문제는 환송연회에서 대화의 화제로 떠오르지 않았다. 나중에 물었더니, 소식을 들은 북녘 사람들 가운데 김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사실 자체를 타박하는 이는 없었다. 다만 그들의 ‘어버이’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먼저 또는 함께 받지 못한 사실에 몹시 착잡해했고, 서운한 기색을 애써 감추려하지 않았을 뿐이다.

김 대통령은 뒤에 영국 방송과 인터뷰 때 김 국방위원장에게 미안하다고 했지만, 노벨상과는 별 상관도 없는 나 또한 북녘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반도의 평화정책 기여가 선정의 주된 이유

“…그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화·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힘을 쏟았다…그가 1997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한국이 민주화 국가로 진입한 확실한 징표였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민주정부를 강화하고 남한 내 내부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김 대통령은 일관된 ‘햇볕정책’으로 50년 이상 지속된 남북한의 전쟁과 적대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그가 북한을 방문한 것은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을 완화하는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그 결과 냉전체제가 한국에서도 종식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가 발표한 수상자 선정경위문에 따르면, 아무래도 핵심은 냉전의 마지막 외딴 섬인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김 대통령의 기여에 대한 평가인 듯 하다. 이 대목에 대해 나는 이의가 없다.

김 대통령은 10월16일 국무회의에서 “노벨평화상은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사람을 구하는 것 뿐만 아니라 가난한 생활의 고통으로부터 사람을 구하는 것도 중요시 한다”며 “따라서 소외계층, 즉 어려운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날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이 인권과 민주주의에서 세계의 모범국가가 될 수 있도록 국민과 함께 노력하겠다”고도 했다. 이런 정책방향에 대해서도 이의가 없다. 다만 진실로 그렇게 하기를 바랄뿐.
노벨상은 다만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것일 뿐, 문제의 끝은 아니다. 10월13일 자신의 고려대 ‘대통령학’ 특강이 학생들의 반대로 무산된 것을 “김정일과 김대중 두 불순한 배후세력의 작품”이라고 몰아부치며, “김 대통령은 노벨상을 받기 위해 북한에 너무나 많은 양보와 경제적 지원을 했다”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썰렁한 반응은 그렇다 치자. ‘김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노벨상을 받기 위해 파주 일대의 땅을 북한에 갖다 바쳤다’는 밑도 끝도 없는 소문이 일부 지역에서 나도는 현상은 심각하다.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지역주의’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심각하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도,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위한 힘겨운 싸움도, ‘지역주의’ 앞에선 초라해지며 빛바래는 게, 불행하게도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을 ‘지역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모할뿐더러 무책임하다. ‘민족주의의 강도는 삶의 여유로움과 반비례 관계에 있다’고 했던가? 민족주의를 지역주의로 바꾸면, 이 말은 온전히 우리에게 적용 가능하다.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고 곤두박질치던 주가가 위로 솟구치는 것도 아니고, 끝없는 기업체의 부도와 해직의 위협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처지가 자동적으로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노벨평화상과 국가보안법의 공존은 형용모순

또한 조금씩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척박한 인권현실은 ‘악선동’을 일삼는 이들에게 비옥한 토양이다. 법원행정처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체포영장에 의한 체포는 6771건인데 반해 (영장 제시없는) 현행범 체포는 3만748건, (역시 영장 제시없는) 긴급체포는 6만6659건에 이른다. 그러나 서울경찰청이 긴급체포한 1만3844명 가운데 30% 남짓이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런 상황을 인권이 살아 숨쉬는 민주사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 97년 1월부터 99년 6월까지 수사기관이 15개 통신사업자로부터 2288회에 걸쳐 비밀번호 3494개를 불법으로 넘겨받아(이는 밝혀진 것일 뿐 실제론 훨씬 광범위한 현상이다) 타인의 통신 내용을 자기 맘대로 들춰본 것은 또 어떠한가.

무엇보다 최악의 반인권-반민주 악법인 국가보안법의 존재는 치명적이다. 대통령과 집권 민주당은 이 법을 개정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노동현장에서, 학원에서, 민주주의와 통일을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의 올가미에 걸려 감옥에 갇히는 이들이 있다. 노벨평화상과 국가보안법의 공존은 형용모순이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와 학술단체협의회는 10월17일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대학교수 649명의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명예로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우는 관점에서 박정희기념관 건립지원 계획을 재고하라”는 것이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지원하는 노벨평화상 수상자, 이 또한 나로선 요령부득이다.

‘평화’란 무엇인가. 제2차 바티칸공회의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에서 규정한 평화의 뜻을 전하는 것으로 두서없는 글을 끝맺으려 한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요 적대세력간의 균형유지만도 아니며, 전체적 지배의 결과도 아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평화는 정의의 실현이다. 더욱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실현해야 할 그 질서의 현실화가 바로 평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