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북미관계의 구조적 성격과 전망] 탈냉전 세계사적 흐름 따라 화해 분위기 이어갈 듯
[시론-북미관계의 구조적 성격과 전망] 탈냉전 세계사적 흐름 따라 화해 분위기 이어갈 듯
  • 김태일 /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승인 2000.11.2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지난 10월 9일부터 12일까지 미합중국을 방문하여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다. 감격적인 장면이었다.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북한과 미국은 아직까지 ‘교전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 미국은 형식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지난 수십년 동안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은 끊임없이 북한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 존재이다. 미국은 한반도에 군사력을 전진 배치하여 수시로 공격적 군사훈련을 실시함으로써 북한을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고, 북한이 다른 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방해하고 있으며 북한의 경제적, 정치적 대외활동을 봉쇄하여 궁극적으로 북한체제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 반대이다. 북한은 항상 동북아시아지역의 평화를 불안하게 하는 파괴적 존재라는 것이 미국의 생각이다. 북한은 수시로 한반도의 남쪽에 대해 정치 군사적 위협을 가해 왔으며, 테러를 스스로 시도하거나 지원하는, 국제사회에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불량국가’라는 것이다.

조명록 부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한 마지막 날인 10월 12일에 발표된 북한과 미국 사이의 ‘공동코뮤니케’는 이러한 양측의 입장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전에도 북한과 미국 사이에는 몇 차례의 주목할만한 합의가 있었지만 이번의 합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교전상태’에서 이루어진
공동합의

북한과 미국 사이에 이런 합의가 이루어진 배경은 무엇일까? 공동코뮤니케의 내용을 꼼꼼히 따져 보면 북한과 미국이 각기 의도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이 미국과의 합의를 통해 달성하려는 기본적 목표는 ‘체제 안전’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이끌고 있는 북한체제는 오래 전부터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군사적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 결연하게 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체제 안전을 지키기 위한 가장 실효성있는 방안은 미국의 보증이라고 북한은 보고 있다. 그래서 북한은 미국에 대해 대북 경제 제재를 해제하고 테러지원국 지정도 해제해 달라는 요구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작년 9월 대북 경제 제재 완화조치를 부분적으로 취한 바 있으며 이번 공동코뮤니케에서는 ‘호혜적 경제협조와 교류를 발전시키기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하였다’고 밝힘으로써 제재 완화를 확대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테러를 반대하는 국제적 노력을 지지 고무하기로 합의한다’고 함으로써 이를 근거로 테러 지원국 지정 해제를 위한 작업을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북한은 미국과 남한으로부터 제기될지도 모를 체제 위협에 대한 걱정을 심각하게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주권국가로서 체제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하며 불가침과 내정 불간섭을 확실하게 약속받고 싶어한다. 그런 점에서 적대적 관계의 청산, 자주권의 상호존중을 약속한 이번 합의는 북한으로서는 큰 소득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북한은 외부로부터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들 수 있게 된다.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에서 달성하려고 하는 기본 목표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지역에서 미국이 유지하고 있는 패권적 지위를 손상받지 않고 그것을 확대하는 데 있다. 이런 목표에 비추어 보면 북한의 존재는 미국의 이익에 도전하는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이다.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군사 도발을 계속하여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지역의 안보를 위협해 왔다. 민간시설과 민간인에 대한 테러를 하여 안전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핵무기 확산 금지, 미사일 개발 제한 등 대량살상 무기를 통제하려는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해 왔다.

이것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한반도의 평화는 심각한 위기에 빠질 것이고 동북아시아 지역의 세력균형에 큰 혼란이 올 것이라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다. 가령 북한의 미사일 개발을 막지 못하게 되면 그것은 일본의 군비증강을 불러올 것이며 궁극적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걷잡을 수 없는 군비경쟁을 야기할 것이 분명하다는 판단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미국의 세계적 패권을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미국은 북한이 지난 93년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한다는 파동을 일으켰을 때나 대포동 1, 2호와 같은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 부단한 노력으로 그것을 저지하였다. 미국이 이 문제를 푼 방법은 비군사적 수단에 의한 것이었다. 핵문제는 중유를 제공하고, 경수로를 지원하는 방법으로 해결했고, 미사일회담은 대북 경제 제재를 완화하는 조건으로 풀었다.

북미 관계는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의 관건


99년 9월에 발표된 페리보고서가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미국이 북한을 다루는 전략의 기본 방향은 비군사적 수단에 의한 포용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공동코뮤니케에서도 북한과 미국은 ‘미사일문제의 해결이 북미관계의 근본적 개선과 이 지역의 평화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며 미사일문제와 관련한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였고 ‘금창리 지하시설에 대한 접근이 미국의 우려를 해소하는데 유익하였다’고 하여 핵문제 해결에 대한 전향적 입장을 서로 확인하였다.

앞으로도 미국은 대북 수교와 경제협력 및 지원 확대 등을 수단으로 북한이 미사일 발사와 수출을 하지 아니하고 핵과 미사일을 제거하며 남북 군사적 신뢰구축 등을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나서도록 노력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국내 정치와 관련하여 향후 북미관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라는 문제에 걱정이 많다. 그러나 그다지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미국은 ‘페리 프로세스’로 일컬어지는 기존의 대북 포용정책을 계속할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클린턴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은 미국 내부에서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이미 탈냉전의 큰 흐름 속에서 많은 가시적 성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낸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의 계기, 대북 화해 정책에 기초한 동북아시아 지역의 안정 등을 전세계가 확인하고 동의하고 있는 마당에 미국의 정책 기조가 크게 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요구하고 있는 미사일 개발 중단, 핵 투명성 제고, 4자회담 참여, 군비통제, 군사적 신뢰구축 및 군비 감축, 평화협정 체결이나 북한이 미국에 대해 요구하고 있는 경제 제재 해제, 테러 지원국 지정 해제, 대북 군사위협 철회,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문제 등은 두 나라의 진지한 협상에 의해 단계적으로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국내정치 변화, 군산복합체의 방해, 북한의 내부 정세 등에 의해 북미간의 협상이 진전과 교착, 퇴행을 하겠지만 그 어느 것도 탈냉전의 세계사적 흐름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