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빛과 그늘
월드컵의 빛과 그늘
  • 배익현 기자
  • 승인 2002.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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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인류의 축제 2002월드컵이 시작된지 벌써 10일이 넘었다. 평소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월드컵 경기 만큼은 챙겨볼만큼, 월드컵은 '스포츠 행사'라는 성격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축제의 장이 되었다. 사람들의 이러한 관심을 반영하듯 TV, 신문등 어느 매체를 막론하고 화면과 지면을 온통 월드컵이 도배하고 있다. 대 폴란드전에서 1승을 한 이 후, 한국의 16강 진출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의 월드컵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져 있다.

사람들이 월드컵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을테지만, 무엇보다 축구라는 스포츠가 그만큼 재미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비수를 따돌리는 화려한 드리블과 통렬한 슛, 이것 만큼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것이 또 없다. 게다가 월드컵이라면 전세계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데다, 일견 국가와 민족간의 비폭력적인 모의 전쟁과 같은 대결양상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단일민족국가인 우리 나라는 이런데에 빠질 수 없다. 다른건 몰라도 축구로는 일본에 져선 안된다는 사람들의 심리나, 미국전에서 동계올림픽때 강탈당한 금메달에 대한 보복 응원등은 월드컵 열기의 이면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다.) 게다가 지금은 개최국이라는 상황까지 겹쳐, 모든 사람들의 눈을 월드컵에서 뗄레야 뗄 수 없게 만든다. 그야말로 '뜨거운 월드컵'이다.

'월드컵 자본주의'

그러나 이런 열기는 자본과 만나 쉽사리 상품성으로 탈바꿈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 그 자체가 시장이 되는 것이다. 각종 기업들이 월드컵을 상품으로 스포츠 마케팅을 벌이고 있고, 미디어는 축구의 부가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월드컵을 개최하는 FIFA, 즉 세계축구연맹이 있다. 98년 월드컵이 끝나고 축구의 상품화 가능성이 인정되기 시작하면서 극도의 상업화로 치닫고 있다. 월드컵이 얼마나 상업화 되고 있는가는 단적으로 지난 1998년과 2002년 월드컵의 중계권료만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 중계권 협상을 FIFA와 대륙연합 방송사간에 벌이던 지난 98월드컵까지의 구조에서 스포츠 이벤트업체에 독점권한을 FIFA가 팔아버리는 구조로 바뀌면서 결과적으로 중계권료가 10배이상 뻥튀기 되어버린 것이다(송해룡, 2002). 한국 방송 3사가 2002년 월드컵을 위해 지불한 중계료는 약 3500만 달러로, 지난 98년 대회와 비교해 24배나 뛰어오른 금액이다.

물론 FIFA 뿐만이 아니다. FIFA와 모종의 협력관계에 있는 기업들이 벌이는 지나친 스포츠 마케팅은 월드컵을 축구경기라고 생각하기보다 회사 발전을 이루기 위한 판매처로 본다는 혐의를 벗기 어렵게 한다(임현진, 윤상철, 2002).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후원회사(sponsoring) 제도다. 스포츠는 재정지원을 받고, 기업은 스포츠를 통해 광고효과를 얻는다. 그런데 이런 후원회사 제도가 스포츠의 변질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축구라는 문화상품을 통해 대중의 소비주의를 자극하고, 이렇게 증폭된 소비의 증가가 자본주의의 과잉생산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월드컵은 단일시장과 교역의 확대라는 위로부터의 지구화에 조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달 28일 서울에서는 아동을 포함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월드컵후원 초국적기업 반대캠페인도 열렸었다. 월드컵을 후원하거나 스포츠 용품을 제작하는 맥도널드, 코카콜라, 나이키, 아디다스 같은 초국적 기업들은 하나같이 생산라인을 아시아에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노동착취는 이미 정평이 나있다. 회사마다 노동자 강령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 월드컵 공식구 피버노바를 만드는 것은 파키스탄, 인도의 10살 내외의 어린이 들이며, 이들은 공을 만들기는 하지만 정작 그것을 가지고 놀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전혀 없다. 작업환경마저 나빠 이들은 대부분 어른이 되기 전에 시력을 잃는다. 축제 한쪽에서는 축구를 팔아 돈을 벌어 배를 불리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한번 차 보지도 못할 공을 고사리 손이 깁고 있다는 것은 월드컵이란 축제가 지닌 검은 그림자다.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월드컵

월드컵은 정치에서도 자유스럽지 못하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때 아르헨티나 정부가 자국 독재 정권의 선전용 행사로 대회를 이용하는 것에 항의해, 당시 축구 스타였던 요한 크루이프와 베켄바우어가 참가를 거부한바 있다. 스포츠를 통해 국민의 관심과 불만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정치적 수법은 로마의 콜로세움부터 시작해 근대 한국의 전두환 정권의 체육정치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문제는 이런 낡고 오래된 수법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월드컵의 지나친 열기는 한동안 시끄럽던 대통령 아들들의 권력형 비리문제, 차세대 전투기 사업의 결과, 기업 대량 해외 매각 등의 중대한 국사를 완전히 뒤덮어버렸다. 오는 13일 있을 지방선거의 열쇠는 노풍이 아닌 '히(딩크)풍' 이 쥐고있다는 우스갯소리는 지방선거라는 중요한 정치적 행사가 월드컵에 완전히 묻혀버린 현실을 반영한다.

축구에 대해 사회심리학적으로 접근한 연구(이만우, 2002)를 보면 축구속에는 당파주의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기제가 있다고 한다. 축구경기 응원 속에서 으레 드러나는 이러한 민족주의, 국가주의는 경기장 밖에서는 전체주의적 일사불란함을 요구한다. 성공적 월드컵 개최에 대한 열망이 특정인들에게 정도 이상의 절제를 강요하는 것이다. 지금도 거리에는 월드컵기간중 파업하지 말자는 택시운전기사조합의 현수막이 나붙어 있고, '거리의 미관을 해치는' 노점상들은 완전 철거당했으며, 노동자들은 축구경기 때문에 생존권 투쟁(노동쟁의)의 유보를 강요받고 있다.

성공적인 월드컵 개최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국민들의 행복권을 짓밟는 것은 과연 이런 축제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월드컵인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어찌보면 당연할 수도 있는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통한 국위선양 및 나라발전이지만,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전체주의적 선동과 그것의 정치적 악용은 분명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월드컵의 강력한 빛이 그 뒤에 숨어있는 그림자를 가리고 있다. 축구를 팔고 사는 대상으로 이용하는 FIFA와 초국적기업, 그 열기에 편승하는 정치인, 그리고 전체주의와 국가주의가 살아있는 한 월드컵을 '전인류의 축제'라 부르기에는 그 그늘이 너무나 짙고 어둡다. 숨겨져 있는 이 그늘을 똑바로 쳐다보고 진실을 알아내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