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테러와 보복공격 그후
[국제] 테러와 보복공격 그후
  • 최연구 / 인문사회학부 강사
  • 승인 2001.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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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러와 보복공격 그후
-집단적 광기 대신 권력에 대한 자기성찰 필요한 때-

결국 미국테러사태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식의 폭력의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충분히 예상했던 바이지만, 미국-영국의 카불공습으로 소위 ‘얼굴없는 적과의 불확실한 전쟁’은 시작되고야 말았다.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시작된 20세기가 대량학살, 인간성의 파괴로 점철되었다면 21세기 벽두에도 테러와 보복전쟁은 인류를 폭력과 공포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두 번의 세계대전, 휴머니즘의 전반적인 위기로 점철된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극단의 시대’는 21세기 벽두에도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극단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비행기가 마천루를 들이받고 세계최강국의 중심 건물이 무너지는, 그야말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장면은 TV를 통해 전세계로 방송되었다. 수십 번 반복된 이 끔직한 장면은 시청자들의 이성과 판단력을 마비시켜 버리고, 온종일 미국언론에 노출된 지구촌은 미국인의 눈으로 사태를 바라보고, 그들의 편에서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분노하는 공동체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 공동체는 이성 위에서 형성된 신중한 인간공동체가 아니라 보복, 응징 등의 섬뜩한 구호와 미국이 강요하는 흑백논리에 의해 형성된 집단적 광기의 공동체이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더 호들갑을 떨고 있는 우리는 더더욱 그러하다. 세계 전쟁, 세계 경제 위기 가능성 등 극한적인 가정에만 매몰된 채, 시선은 온통 미국을 향하고 있다. 미국경제가 기침하면 한국경제는 독감에 걸린다더니, 미국이 테러를 당했을 당시 한국은 심장마비라도 일으킬 정도였다. 부시 정부의 여론몰이에 편승한 한국인들은 아랍인들의 그간의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으면서, “아랍인들은 증오의 화신”이라는 선입견을 여과없이 받아들였다. 김대통령은 영국-미국의 공습이 시작된후 부시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미국의 아프칸 무력공습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테러보다 더 큰 정신적 충격과 혼돈

이번 테러는 테러 참사의 엄청난 물리적 피해 규모 이상으로 우리에게 정신적 충격과 혼돈을 가져다 주었다. 순식간에 진행된 동시다발테러, 즉각적으로 표명된 보복의지, 세계 전쟁을 방불케 하는 전쟁 준비, 난무하는 흑백논리와 국제사회의 강압적인 편가르기, 아랍근본주의자에 대한 마녀사냥식의 일방적 여론몰이 등 일련의 사건 추이는 한마디로 ‘이성을 벗어 던진 집단적 광기’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테러 이후 미국인들이 보여준 집단적 대응의 요체는 결국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식의 증오심과 강한 미국을 위한 이기적 쇼비니즘이었다. 부시는 세계각국에 “미국의 편에 서거나 테러의 편에 서라”는 이분법적 경고를 했고, 미 상곀臼坪?부시 대통령에게 테러에 대한 보복공격에 무력사용을 허용하는 결의안을 1표를 제외한 몰표로 승인했다. 테러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며 젊은이들이 자원입대하고 있고, 기독교 목사들조차 평화보다는 악에 대한 응징을 설교하고 있다는 보도도 잇달았다. 최근 ABC 방송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테러이후 부시의 업무수행능력에 대한 지지는 86%, 전쟁을 포함한 군사행동에 대한 지지 역시 86%로 집계되었다.

놀라운 점은 많은 사상자가 나더라도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의견이 69%에 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로 흥한자, 칼로 망한다”며 의회의 무력사용 허용결의안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바버라 리 하원의원의 의견이나 ‘전쟁은 테러(War is terrorism)’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반전론자들의 주장은 응징과 보복을 요구하는 절대다수의 목소리에 힘없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절대다수가 테러범들은 아무런 이유없이 무고한 생명에게 테러를 가하는 악마라고 생각하며, 이들에 대해 무제한적인 피의 보복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시 ‘집단적 광기(mass insanity)’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인들은 정작 중요한 질문은 제기조차 하지 않고 있다. 테러범들이 왜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자행했는가, 또 이런 비극을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엄숙한 자성 없이는, 설사 무장병력 4만 여명에 불과한 아프간의 탈레반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오사마 빈 라덴을 생포해 처형한다고 해도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탈레반 정권의 최고 지도자 오마르는 지난 9월 25일 미국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하면서 “미국은 그간 이슬람 국가들에 대해 잔학행위를 저질러왔고, 이번 테러는 미국의 잘못된 정책에 대한 보복행동”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공격대상인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의 이런 이야기도 한번쯤은 진지하게 경청하고 이슬람인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을 돌아 봤어야만 했다. 그간 미국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에서는 노골적으로 극우 유태계의 입장을 두둔해 왔고, 이라크, 이란, 리비아 같은 회교국가들을 테러국가로 규정해놓고 정치적 압박에다 엠바고 때로는 무차별 공습까지 일삼아왔다. 게다가 소위 깡패국가(rogue states)의 미사일 위협에 대처한다는 명분으로, 동맹국들까지 반대하는 가운데 무리하게 미사일 계획(MD)을 강행해 왔다. 이번 테러는 바로 이런 배경 하에서 일어났음에 주목해야 한다.

한편, 오늘날 미국이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나 이라크의 후세인은 다름아니라 미국 자신이 지원해서 키운 세력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아프가니스탄의 친소 사회주의정권인 나지불라 정권을 붕괴시키고자 탈레반 세력을 노골적으로 지원하고, 호메이니 주도의 이슬람혁명으로 들어선 반미이슬람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라크의 후세인을 전격 지원해 이란-이라크 전쟁을 부추겼던 장본인이 바로 미국이라는 사실은 엄청난 자기모순이다. 일찍이 19세기의 영국 정치가 파머스턴 경은 “국제정치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영원한 것은 민족의 이익뿐이다”라고 갈파한 바 있다. 이라크나 탈레반을 한때는 혈맹처럼 지원하다가 이제는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반인륜국가로 몰아세우는 것은 ‘정의’의 논리가 아니라 ‘미국의 국익’이라는 대의이다.


미국에 의한 세계 평화는 가능한가

이번 테러로 수천 명 이상의 미국인이 희생되었지만 미국인에 의한 무고한 인명살상은 그 이상이었다. 걸프전 당시 미국인의 무차별 공습과 지상군 작전으로 이라크군 20만명과 무고한 민간인 8만 여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엄청난 인명살상 앞에서 당시 인권을 이야기했던 미국인들은 거의 없었고, 세계언론 역시 지금과는 달리 침묵만 지켰다. 미국이 당하면 문명에 대한 도전이고,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을 초토화시키는 것은 정의로운 응징이라는 식의 논리는 역시 ‘칼 쥔 자의 논리’이다.

테러는 눈에 보이는 결과로서의 한 현상일 뿐이다. 사실 무고한 희생이라는 결과만 놓고 본다면,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자살 폭탄 테러나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테러, 미국의 리비아 무차별 폭격이나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결과의 끔찍함에 대한 분노와 이에 대한 보복 다짐만 난무한다면 문제의 본질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다. 테러라는 고름은, 짜낸다고 꼭 없어지지는 않는다. 곪았다고 무조건 힘으로 짜내려고만 하면 오히려 더 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테러가 극단주의자들의 개인적 광기라면, 테러근절이라는 미명으로 자행하는 무차별 폭력은 ‘집단적 광기’이다.

위기의 상황에서 진정 미국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가공의 군사력이 아니라 초강국으로서의 관용과 자성, 그리고 이성적인 리더십이다. 강자의 미덕은 무력이 아니라 똘레랑스이며, 지배자의 미덕은 여론재판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자기성찰이다. 강한 것이 위대한 것이 아니며, 적의 자유 역시 자신의 자유만큼이나 소중하다는 것을 미국인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한, 미국에 의한 평화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