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아끼는 사회
사람을 아끼는 사회
  • 승인 2001.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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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 환인의 아들 환웅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고조선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시대의 중심사상이던 불교에서는 인명을 귀하게 여겨 전쟁에 임하는 화랑들조차도 살생유택(殺生有擇)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조선 말, 동학 운동에서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기치로 내세웠다. 한민족이 진정 평화를 사랑하여 흰옷을 즐겨 입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남아 있는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겼던 것만은 사실이다.
18세기부터, 서구를 중심으로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그 이후로 물질적인 부가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고, 추상적이기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서양의 윤리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되었다. 기술문명에서 뒤지는 바람에 19세기 전반에 걸쳐 서구의 식민지 쟁탈전에 희생당해야 했던 동양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이 서양식의 기술과 그 저변에 깔린 윤리를 받아들이고, 고유의 사상이나 문화보다 그것을 우수하게 느낀 것 역시 당시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엘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1980년 <제 3의 물결>을 발간하면서 세계, 특히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던 서구의 패러다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토플러는 농업 시대, 공업 시대에 이어 정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 예측하고 그러한 정보 사회에서는 정보와 지식의 축적과 보급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서 변화 속도 역시 매우 빨라질 것이라 예견하였다. 21세기 초반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정보화가 이 세상을 얼마나 크게 변화시켰나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토플러의 책이 20년이 넘도록 명저로 회자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마지막 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토플러는 새로운 사회가 고도의 과학기술에 의하여 반산업주의적 성격을 가질 수 있고, 그 결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을 중요시하는 문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대량생산체계 속에서 개성을 잃고 인격을 상실했던 인간이 다품종 소량생산 체계 속에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정보와 기술의 발전에는 한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애니악으로 시작되었던 컴퓨터는 이제 명함 크기로 안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어지간한 지식이나 자료는 전 세계가 같은 속도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한때는 치명적이라 생각했던 많은 질병이 인간의 통제권 안에 들어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신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탄생과정까지 손을 대려 하고 있다. 18세기 시작된 공업화가 환경파괴와 계급 갈등 등 인류에게 미친 해악을 생각한다면, 정보화 사회 역시 우리에게 한없이 밝은 미래만을 보장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무슨 일을 하건, 어떤 분야의 연구를 하건 항상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앞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자세도 중요하겠지만, 가끔은 숨을 돌리고 지금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내 연구가 인간에게 과연 어떤 영향을 주는가, 그리고 기왕이면 인간에게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모든 인위적인 제도나 장비는 자연에 해가 되므로 옳지 않다고 믿었던 노자나 장자의 사상은 시대착오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무조건 빠른 것만이 좋다는 생각도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모든 일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아끼는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