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러시아에서 바라보는 2001년의 한국 전망]
[특별기고-러시아에서 바라보는 2001년의 한국 전망]
  • 김기현/동아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 승인 200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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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극복과 남북 관계가 2001년의 화두

“한국 경제, 정말 괜찮습니까?” 새해를 맞으며 모스크바에서 만나는 러시아인들로부터 이런 걱정스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들은 대부분 대우와 현대사태부터 은행파업에 이르기까지 한국 상황을 꿰고 있는 이른바 ‘한국통’들이다. 그러나 한국과 별 상관없는 평범한 러시아인들도 한국 사정을 제법 잘 알고 있다.

휴대전화기 딜러를 하는 한 여성(31)은 “한국에 다시 경제위기가 오면 러시아도 큰 일”이라고 농담(?)을 했다. 97년말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들어간지 8개월 후 러시아도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을 선언하게 됐던 사실을 용케도 기억해낸 것이다.

새해, 한국사회의 화두는 단연 ‘경제’이다. 정보통신(IT)분야의 벤처열풍을 타고 몇 달 전까지만해도 사상초유의 호황을 누리다가 갑작스럽게 위기에 빠진 경제를 어떻게 되살릴 수 있느냐에 관심에 모아지고 있다. 러시아 전문가들도 한국의 경제 상황을 주의깊게 보면서 나름대로 전망을 내어놓고 있다.

러시아도 한국 경제가 주요 관심사

러시아는 최근 한국과의 관계에서 무엇보다도 경제협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또 러시아가 한국의 경제 상황에 민감하게 신경 쓸만큼 경제분야에서 두 나라의 관계는 밀접해졌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큰 자동차판매회사인 압토미르(Avtomir)의 예브게니 사타예프 회장(36)은 대우자동차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 3년 동안 러시아내의 외제차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지킨 대우차 판매에 주력해왔기 때문이다. 사타예프 회장은 한국기업과 일해본 경험을 통해서 한국기업의 ‘공격적인 경영’에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늦어도 새해 하반기에는 한국 경제가 되살아날 것으로 낙관했다.

러시아에서는 특히 97년 한국이 경제위기를 겪은 후 한국 경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한국이 단기간에 IMF 관리체제에서 벗어나자 그 배경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한국의 관계 재계 인사들이 모스크바를 방문 ‘한국경제 설명회’를 가지기도 했다. 천문학적인 규모의 외채(2000억 달러로 추산)를 지고 IMF 등 국제경제기구의 차관에 의존하고 있는 러시아는 한국의 사례를 분석해 도움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10여년 전 러시아가 처음으로 사유화를 실시해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옮겨가는 시장개혁을 시작했을 때도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러시아 내부에서 나왔다. 특히 정치적 민주화는 유보하고 국가가 경제 성장을 주도하는 ‘박정희식 경제개발’을 경제발전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한때 고개를 들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는 이러한 ‘개발독재 모델’은 이미 낡은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러시아는 남·북한철도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연결, 시베리아 가스전 등 러시아내의 천연자원개발 등에 한국이 적극적으로 투자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당분간 한국경제가 어려울 것으로 보여 한국의 러시아 투자도 힘들어질 전망이다. 한국경제 전문가인 스베트라나 수슬리나(40*여) 러시아 극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한국의 경제개혁 속도와 진행을 지켜봐야 한다”며 새해 한국경제를 전망하는데 조심스런 입장을 보였다. 그는 97년의 경제위기가 국제금융시장의 불안 등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면 현재는 구조조정의 미흡 등 내부적 요인이 더 크다고 분석했다.

특히 러시아 학자들이 한국경제 발전의 견인차 노릇을 했으면서도 ‘병폐’로 지적되어온 대기업 위주의 경제 운용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 역시 ‘올리가르흐’(Oligarch* 과두재벌)로 불리는 금융-산업재벌들의 경제적 독점현상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수술리나 박사는 한국이나 러시아나 현재 진행 중인 개혁 과정에서 재벌 위주의 경제가 상당부분 청산될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과 러시아는 1990년에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그후 양국관계는 여러 분야에서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여기에는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축적된 연구와 이해가 바탕이 됐다. 러시아는 이미 19세기부터 한국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한국학의 전통과 풍부한 이해는 놀라울 정도다. 러시아가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지정학(地政學)적인 이유 때문.

특히 러시아는 ‘남·북한 관계’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한반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고 극동지역은 러시아가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역 중 하나이다. 러시아는 통일을 비롯한 한반도 정세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남북 관계의 가장 중요한 변수

새해 초 러시아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모스크바로 초청하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서울을 방문할 계획이다.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한 관계가 급속히 발전하자 러시아는 가장 먼저 ‘환영’을 나타냈다. 러시아는 사실 주변 강대국 중에 한반도의 안정을 가장 절실히 원하는 국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실적으로 복잡한 국내문제 때문에 한반도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개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대해 평가는 후하다. 러시아 관영 이타르타스 통신은 2000년 국제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을 함께 선정할 정도로 남·북한 관계 진전은 러시아에서 인정받고 있다. 대부분의 러시아 전문가들은 새해에도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방문 등 남·북한 관계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큰 계기가 여러차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새해 남·북관계에 대해 신중한 전망도 많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산하 동방학 연구소의 유리 바닌(68) 교수는 “급진적인 남*북 관계 진전에 대한 한국내 반대 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며 “김대중 대통령이 국내의 반대세력을 잘 설득하며 일관성있게 대북정책을 밀고나가느냐가 관건”이라고 전망했다.

구 소련 외무장관으로 독일 통일과 냉전종식을 주도했던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그루지아 대통령(72)은 새해에도 북한의 태도가 남·북관계 변화의 가장 중요한 변수라는 의견을 내어놓았다. 그는 “최근의 긍정적인 분위기가 반전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인내심과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했다. 북한과 같은 체제는 외부세계와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