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탐구] 명예제도(Honor System)
[집중탐구] 명예제도(Honor System)
  • 임강훈 기자
  • 승인 2002.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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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할 ‘소중한 약속’

명예제도(Honor System)란 학생들 스스로가 자신의 명예를 지켜나가기 위해 만드는 자율적인 규약을 뜻한다. 미 Duke 대학에서 처음 만들어져 현재 Stanford대, Caltech 등 미국 내 여러 명문대학에서 명예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학교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학업과 관련해 양심을 지키고 정당한 학문을 해나가자는 학생들 스스로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학교에서도 올해 초 명예제도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얼마 전부터 명예제도에 대한 홍보활동에 나섰다. 사실 우리대학에서 명예제도를 도입하고자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1998년 학생회칙 개정에 따른 신입생 서약서 폐지와 함께 명예제도를 만들기로 총학생회와 학교 측과 합의 되었던 것이 해마다 학생들에 대한 홍보와 추진력 부족으로 번번히 미뤄져오다 올해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지난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명예제도 도입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최근들어 우리학교에서 점점 심각성을 더해가는 시험 부정행위, 비양심적인 과제 수행, 휴학생의 급증 등은 학생들의 학업 의식에 작은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해주고 있다. 명예제도는 더 이상 학교홍보 차원의 형식적인 명문화만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침체기 아닌 침체기를 걷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우리학교 전반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도약이 되어야 한다.

명예제도란 무엇인가

아직 국내 대학에서는 명예제도가 채택된 사례가 없다. 원칙보다는 의리를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특성과 더불어 아직 “스스로 지킨다”라는 선진문화가 정착되어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절친한 친구가 자신에게 비양심적인 협조를 간절히 부탁해올 때 그것을 강경히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사회에서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의 명예제도가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서구의 문화에서 만들어진 그것과는 차별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명예제도의 기본 정신이 변형되어서는 안된다. 외국 대학의 명예제도를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닌 우리들만의 명예제도를 재창조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명예제도를 오래전부터 채택해 온 미국 대학들의 경우도 처벌조항의 적용 여부, 생활부분으로까지의 적용범위 확대 등은 대학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는 아직 원칙에 충실한 문화, 적극적인 고발문화가 정착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상태에서 서구의 것을 그대로 따라해 적용시키는 것은 무모한 일이 될 것이다.

명예제도의 올바른 정착을 위해서는 명예제도가 그 자체로 새로운 명예의식을 만들어 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즉,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명예제도의 첫 모습은 막연히 “이러이러한 원칙을 지켜라”는 식이 아닌 우리들만의 새로운 명예제도 형성을 위한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전 구성원들의 동의 하에 가장 기본정신이 되는 ‘명예선언(Honor Code)’를 제정하고 그에 따라 학교구성원들이 스스로 그에 입각한 규칙을 하나씩 만들어나 갈 수 있는 구체적인 제도 확립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학교만이 가진 특성을 살리는 일도 중요하다. 우리학교는 구성원의 대부분이 학교 내에서 주거를 함께 해, 학업과 생활이 완전히 분리 될 수 없는 환경을 가지고 있다. 명예제도 채택 기준에 있어서 이러한 부분도 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명예제도에 우리들만이 자부심을 가지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명칭을 부여하는 일도 필요한 일이다.

자발적 참여없이는 ‘모래성’에 불과

명예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된 대학이라면 어느 대학을 불문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수많은 난관을 거쳐갔다. 처음 명예제도를 정착시킨 Duke 대학의 경우 100여년동안 명예제도가 존재했다 사라졌다가는 반복하며 수많은 변화를 거쳐 형성이 되었고, Stanford 대학의 경우에도 7년간의 지속적인 홍보와 노력 끝에 겨우 명예제도를 제정하는 등 대부분 대학들이 10여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에 걸쳐 명예제도를 정착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중에는 명예제도가 일시적으로 실시되었다가 중도포기해버린 대학도 있다. 우리학교 역시 몇 년전에 명예제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 그동안 여러차례 시도가 있기는 했지만 사실상 아무런 진척사항이 없었고, 홍보도 제대로 이루어 진 적이 없다.

명예제도는 구성원들 스스로의 의식으로부터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구성원들의 동의 하에 만들어지지 않은 명예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만들어진다고 해도 곧 구성원들에게서부터 외면당하고 그야말로 이름뿐인 명예제도가 될 것이다. 성공적인 명예제도 정착을 위해서는 장기간적인 계획을 통한 지속적인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지속적인 홍보와 의견수렴을 거쳐 신중히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명예제도의 구체적인 제시 없이 단순한 홍보와 의견수렴에만 힘쓴다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학생들이 그저 형식적인 행사 정도로만 여기고 넘어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명예선언(Honor Code)’의 제정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명예제도의 기본정신을 나타내 줄 ‘명예선언’은 국법에 있어서의 헌법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역시 구성원들의 동의를 구해야하는 일이나 명예제도의 근본적 방향은 명확히 제시되어있어 제정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또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명예제도가 비단 학생들만을 대상을 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명예제도의 근본적인 목적은 학생들이 양심적인 학문 활동을 하도록 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아무리 명예제도가 학생들 스스로의 규약이라고해도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좋은 명예제도라고 해도 그것을 시행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그 실효성을 잃게 된다. 그리고 그런 환경을 조성해나가는 것은 학생들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올바른 명예제도는 학생과 교수, 직원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는 의식이 학교 내에 확산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활동 중인 명예제도준비위원은 학생 대표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물론 지금은 학생들의 자발적인 의식을 이끌어 내는 것이 더 중요하기는 하지만 교수, 직원과 함께 진행하지 않는다면 의식과 제도가 분리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게 될 우려도 있다. 명예제도가 학생들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약속인 만큼 학생대표가 그 주축이 되어야함은 당연한 일이나, ‘명예선언’ 제정이나 무감독 시험 실시, 기념관 설립 등의 실질적인 제도 반영에 있어서 교수, 직원들도 명예제도위원의 일원으로서 참여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학생 뿐만 아닌 구성원 모두의 약속

명예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각 대학들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그 핵심이 되는 명예의식의 내용은 모두 공통적이다. 바로 “허락되지 않은 타인의 이점을 부당하게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불문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심이 없는 학문은 발전하지 못한다.

우리학교가 표방하는 ‘과학과 국가와 미래를 생각하는 연구중심대학’이라는 말에서 보여지듯 무엇이 진정한 이공학도로 가는 길인가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지켜야 할 명예가 어떤 것인지는 명확하다. 일순간의 출세나 평가위주의 잘못된 세상윤리에 흔들리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학문을 갈고 닦아 세상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명예제도의 정착은 모든 구성원들이 명예제도는 남이 아닌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고 지켜나가야 할 것이라는 것을 잊지말고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할 때만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명예준비위원에서도 앞서 말한 부분들을 잘 고려하여 올바른 명예제도 정착에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