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우리안의 세계화
왜곡된 우리안의 세계화
  • 차미경 / 인권운동가, ‘아시아의 친구들’ 준비위원
  • 승인 2002.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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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 1 : 살색은 하나가 아니다

미국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후 교수가 된 동포 한분이 한 달 전 한국에 들어왔다. 그녀는 점심을 함께 한 자리에서 자신이 느낀 최근 한국사회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난히 한국사람들은 미국인에게 우호적이고 친절하다. 그러나 내가 미국에서 시민권을 갖고 들어 온 사람이라고 대우해 주는 일은 없다. 10년 전만 해도 미국에서 왔다고 하면 달리 봤다. 지금은 다르다. 백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사회 전반에 걸친 반미의식은 참으로 놀랍다.” 백인에 대해서는 과대한 친절을 베풀면서도 ‘양키 고 홈’을 외치는 젊은이들의 나라, 그녀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이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멀리 아프리카에서 날아와 현재 경기도 일산 가구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이다. 그는 영어와 프랑스어도 잘하는, 자기 나라에서 대학까지 나온 지식인이다. 한국에 온 지 8개월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집과 공장 밖을 나서는 것이 편치 않다. 한번씩 쳐다보는 한국사람들의 눈길이 따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 하나, 검은 피부 때문이다.

다양한 체험의 이해가 부족한 사회나 국가는 GNP가 아무리 높아도 타문화, 인종에 대한 배타의식이 높을 뿐만 아니라 차별의식도 높다. 하물며 단일민족으로 살아오며 어릴 때부터 ‘외국 = 미국’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온 한국인의 편견은 오죽하랴? 언젠가 필자가 해외출장을 다녀오며 여섯 살 여조카에게 검은 피부의 인형을 사다준 적이 있다. 평소에 조카가 좋아하는 인형들을 보며 하얀 얼굴의 서양인형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조카는 그 인형을 받자마자 ‘무서워’ 첫마디와 함께 인형을 내던졌다. 그 낯섦의 주 이유는 아이가 아프리카 인형을 한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지구촌의 소비상품은 백인 중심이고 시장은 세계화 되어있다. 그러나 정작 세계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이해는 다양한 세계문화와 인류를 이해하는 참다운 세계화에 근접조차 못하고 있다. 무한대로 뱉어내고 있는 문화제국주의가 자본의 세계화를 지배할 뿐 이다. 그날 이후 필자는 조카에게 살색은 하나의 색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며 미국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것은 ‘반미’가 아니라 진정으로 미국을 극복하는 ‘항미’를 통해서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참고로 나의 조카는 지금, 무섭다고 던져버렸던 아프리카 인형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우리보다 더운 기후에서 사는 사람들은 얼굴이 검다는 것을 스스로 말한다.

편견 2 : 세계교육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시작이다

1990년대 중반 홍콩의 인권단체에서 근무할 때 일이다. 진보적 지식인의 네트워크 단체인 아리나(ARENA)의 필리핀 활동가가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6박7일 동안의 청년워크숍에 참석했는데 워크숍 기간 내내 한국 사람들 누구도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워크숍 마지막 날이 돼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는 오른쪽 귀에 귀걸이 하나를 걸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당연히 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국의 진보적 청년들조차 그를 ‘게이’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그를 경계했다. 편견이 낳은 결과였다. 지금이야 <동성애자 인권연대>라는 인권단체도 생겼지만 그 당시만 해도 활동가가 게이-레즈비언이라고 하면 모두들 놀랄 만큼 소위 운동권은 편협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공존’만큼이나 의식과 생활 속에서의 ‘공존’은 두터운 한국사회의 벽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다. 그러나 익숙하지만 불필요한 편견의 옷을 벗기도 전 자본의 세계화는 훨씬 빠른 속도의 문화제국주의를 통해 우리의 생활과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인간의 다양한 아름다움과 모순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공존’을 향한 깨달음은 이보다 더디기만 하니 참으로 답답하다.

편견 3 : ‘또 하나의 학교’ 가 필요한 우리들

며칠 전 중국을 떠돌아다니며 목숨을 유지하던 25명의 북한 주민들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신문 가득 채운 기사 속 아이들의 얼굴 앞에서 눈길이 멈췄다. 이 아이들이 과연 한국의 현실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부디 남한의 아이들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어떤가?

북한에서 온 대부분의 아이들이 겪는 고충은 학교 부적응으로부터 시작된다. 남한의 청소년들도 학교생활을 힘들어하는데 하물며 체제를 달리하고 살아온 이들에게 학교생활의 고충이 어떨 지 상상만으로도 익히 짐작된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이질적인 교과 과정이 아니라 남한 아이들과의 관계라고 한다. 북한의 사투리를 쓴다고 무시하는 우리 아이들, 익숙하지 못한 남한문화에 서투른 북한의 아이들을 보며 남한의 아이들은 이들을 ‘왕따’시켰다.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일부 아이들은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 학원으로 돌아섰다.

민족이 다르고 얼굴색이 다르다고, 미국이 아닌 제 3세계라고 무시하는 비뚤어진 세계화의 그늘만큼이나 남-북의 현실은 그렇게 배타적이고 차가웠다.

공교육이 지금 당장 이남의 아이들과 이북의 아이들에게 서로 공존하는 모습을 가르치지 못하고, 가난한 제3세계의 이웃들이 무시당할 권리는 이 세상 어디에 없다는 것을 지금 당장 가르치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학교’를 교육 안팎으로 세워내야 한다. 참다운, 인간중심의 세계화를 가르치는 학교를 통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찾아가는 시민사회를 개척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 안의 왜곡된 세계화를 허물어 가는 참교육이다.

세계화를 외치며 유학이나 어학연수 따위로 해외파를 육성하기보다, 지금 당장 우리 안의 허약한 세계화의 현실을 깨닫고 ‘공존’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다양한 노력과 시도를 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21세기 세계화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인재양성의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