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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선거에 출마하게 된 동기는김재현(이하 김): 3년 동안 총학생회(이하 총학)에 참여해오며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일을 하면서 내 자신의 생각과는 맞지않는 부분들도 많았다. 이런 점들을 바꾸고 싶기에 이번 선거에 출마를 결심했다. 그리하여 ‘투명한 총학’에서는 현재 총학이 신경 써야 할 부분과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보완해 나갈 예정이다. 오 부회장 후보와 함께 출마한 것은 서로가 놓쳤던 부분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좋은 파트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3년간 총학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할 때가 되서 나온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지만 그런 구태의연한 생각으로 출마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다.오남호(이하 오): 총학일을 하다 보면 학생들의 요구나 건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던 때가 많았다. 이번 선거 출마를 통해 학생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실현하고, 모두가 원하는 총학을 그려나가고 싶다. -18대 총학의 활동을 간단히 평가한다면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무마하는 총학’의 이미지가 지배적이었다고 본다. 성실하긴 했지만 일에 대한 대응이 늦거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일한 것 같아 아쉽다. 18대 총학의 임기동안 학생의 권리주장이 필요한 때가 많았지

특집 | 구정인 기자 | 2004-11-03 00:00

-이번 선거에 출마하게 된 동기는유정우(이하 유): 3년간 포항공대 신문사 기자, 학회장 등 직·간접적으로 학생활동을 해오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전체의 0% 정도의 일부 학생들만이 학생활동을 도맡아 해 90%에 가까운 나머지 학생들의 목소리가 소외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 문제점에 대해 지적이 있었고, 총학생회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바꿔나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3년째 경선 없이 내려오는 총학 집행부에서는 이를 바꾸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 ‘OnUs’에서는 이를 바꿔보고자 이번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 상황을 타개해 보자는 취지가 크다. 총학 내부의 인물이라면 내부의 문제점을 밝히고 이를 치유하는 일에 아무래도 소극적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원경연(이하 원): 지금까지는 분반이나 과 외의 다른 학생활동에는 참여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총학 집행부 등의 학생활동에 대해 막연한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 회장 후보가 출마를 권유했을 때 ‘4년 동안 삶의 터전이어야 할 곳에 대한 관심이 너무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출마를 결심했다. 학생활동에 대해서는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앞에서 이야기

특집 | 황희성 기자 | 2004-11-03 00:00

지난 60년간 노벨상 수상자를 70명 이상 지원 배출한 미국에너지성은 최근에는 향후 20년간에 걸친 국가공동이용설비계획을 발표하였으며 총28개 프로젝트의 우선순위를 제시하였다. 우리정부는 차세대 성장동력사업으로 10개 과제를 제시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IT, BT, NT 등 6T 및 기초과학 추진 정책을 수립하였다. 돌이켜 보건데,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여 닐 암스트롱이 첫발을 옮기는 장면의 실황 중계는 전 인류에게 20세기 과학기술의 위대한 성취를 보여줌과 함께 특히 젊은이들에게 한없는 꿈과 희망을 제시하였다. 그 후 35년, 그날의 그 젊은이들은 분명 선진국과 겨룰 수 있는 첨단기술 일부를 보유하고 국가경쟁력을 제고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거대과학이란 아폴로계획과 같이 프로젝트 수행에 많은 경비가 요구되는 단일 과학프로젝트를 지칭하며 개별 국가가 수행하는 국가프로젝트, 유럽연합과 같은 지역공동프로젝트, 세계적으로 추진하는 국제공동프로젝트로 구분한다. 지역공동프로젝트로는 제네바 근교에 자연의 기본법칙을 연구하는 물리학연구용 입자가속기(LHC) 건설이 있다. 이 설비의 규모는 둘레가 약 30km이며 제네바 국제공항 부근 지하 수십 미터에서 마을을 지나 프

특집 | 남궁 원 / 물리 교수 · 대학원장 | 2004-10-13 00:00

소수정예 교육으로 우리학교의 모델이 된 칼텍칼텍의 역사는 1891년에 설립된 캘리포니아 파사데나 시의 Throop university라는 이름의 기술대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설립 이후, 우수한 인재들로 구성된 연구기관으로 발전해나가겠다는 목표를 설정하면서 당시 Throop university는 과학과 공학분야 만을 남기고 다른 교육과정을 과감히 없앤다. 이후 이러한 특성화와 함께 작은 학교의 규모를 이점으로 삼아 더욱 우수한 학생을 키우겠다는 교육철학을 확립하게 된다. 우리대학이 본보기로 삼은 칼텍의 소수정예교육에 대한 철학은 바로 이 때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1920년 이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밀리칸(Millikan)을 비롯한 저명한 기초과학 연구자들이 칼텍으로 옮겨오면서,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상당한 규모의 재정적 지원을 마련하게 된다. 이후 칼텍의 기초과학에 대한 연구성과는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칼텍의 학부교육일반적으로 미국 이공계열의 대학입시에서는 칼텍 학부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입시 점수가 가장 높다고 한다. 미국 대학 중에서도 칼텍은 대학 특성에 맞는 학생들을 가장 잘 선별해내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칼텍은 학부 지

특집 | 박종훈 기자 | 2004-09-22 00:00

현재 우리 대학 재학생의 남녀 비율은 5 : 1 정도로,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일반적인 사회와는 많이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껏 사회 여러 분야에서 제기되어 온 ‘성 문제’는 상대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서 있는 ‘여성’에게 포커스를 맞춰왔다. 하지만 이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그러한 통상적인 시선을 깨트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난 16일, 학생회관 1층 생각나눔터에서 우리 학교의 성문화를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교내의 극단적인 성비불균형’이라는 새로운 렌즈를 통해 포항공대, 포항공대인의 성을 들여다보기로 한다.강진은(이하 강) 사회자 어떠한 정책으로도, 성비를 억지로 단번에 1 : 1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교내 성비불균형에 대한 의견, 개선안 등을 자유롭게 이야기 해보자.김솔(이하 솔) 우선 남녀 비율이 균형을 이루지 못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향을 떠나 생활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모가 (아들보다) 딸을 멀리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이유가 될 것 같고, 사회 전반적인 이공계 기피현상이 여학생들에게 더 심한 것도 이유가 될 것 같다. 여자로서, 사회자의 경우는 어땠나?강 고등

특집 | 강진은 기자 | 2004-09-22 00:00

-지금까지 보람된 일이나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현재 우리 대학 생명과학과의 수준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정도라고 본다. 초창기부터 주임교수로 재직하며 나름대로 학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이 가장 보람된 일이다. 나를 불러주신 고 김호길 학장님과 그 시절 함께 고생했던 교수님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한다.-재직 중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다면모든 학생들이 소중하지만, 특히 세 명의 학생이 기억에 남는다. 나의 첫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김인균 군은 부임 직후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아주 성실히 연구하여 좋은 성과를 내곤 했었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 박사과정 학생인 이소영 양은 지금 연구실 정리를 돕고 있는데, 여러모로 고마운 점이 많다. 학부 지도학생이었던 김남경 양은 줄곧 영국 유학에의 꿈을 키우던 중 내게 도움을 청했었고, 나의 추천으로 리버풀(University of Liverpool), 캠브리지(University of Cambridge) 등에 지원하여 캠브리지로 진학했다.-코넬대학에서 17년간 재직했는데, 우리대학과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코넬대학에는 의과대학에 있었기 때문에 주로 박사후 과정 학생들과 연구를 했던 반면 우리 대학에서

특집 | 강진은 기자 | 2004-09-01 00:00

-정년퇴임과 명예교수 취임을 축하드린다. 개교 때부터 18년이라는 오랜 재직기간 동안 학교와 함께하다 퇴임하게 되었는데 특별한 감회가 있다면미국에서 재미한국기술자협회를 통해 알게 된 김호길 총장을 도와 개교하기도 전인 86년에 이곳에 와서 아무것도 없는 빈 땅에서 포항공대를 일으켜 세웠다. 함께 한 학생들과 다른 교수들의 노력과 열정으로 한국에서 가장 좋은 화학과를 가진 대학 중 하나로 발전시킬 수 있어서 매우 보람찼다. 막상 떠나려니까 섭섭하지만 나이가 많은 교수는 물러나고 젊은 교수들이 활발하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미국은 교수의 정년이 없지만 좋은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좀 더 활발하게 연구활동을 펼칠 수 있는 젊은 교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 -명예교수로서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현재 여러 생각이 있으나 명확하게 결정하지 않았다. 9월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고 무엇을 할지 결정할 것이다. 우선은 사회봉사나 교회의 일을 맡아볼 생각을 하고 있다. -지난 18년 동안 학교에 계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01년에 한국과학재단에서 지원하는 우수연구센터를 성공

특집 | 나기원 기자 | 2004-09-01 00:00

멍들고 찢긴 부안 민심은 아물어 가는가서울에서 자동차로 세시간 반 거리에 있는 전북의 작은 도시 부안. 부안행 막차를 타고 도착한 부안은 잠들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다섯달 전 사진만 봐도 거리마다, 가게마다 노란 반핵 깃발이 내걸리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의외로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간간히 보이는 노란 깃발과 ‘핵종규 퇴진’이라는 스티커가 이곳이 1년 전 분쟁의 장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지난 2월 14일, 주민투표에서 92%의 압도적인 반대표가 나오면서 일단락된 부안사태는 현재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7월 30일부로 주민투표법이 발령된 후 유치를 지지하는 측에서 “다시 주민투표를 해보자”고 하고 있으며, 특히 위도발전협의회의 경우 “위도주민들 만의 주민투표를 하자”며 유치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는 상황이다. 부안의 핵폐기장 유치 세력을 대표하는 부안국책사업추진연대(이하 국추련)에서는 이에 대해 “반핵세력 쪽에서 필승을 자신할 수 없을 것이다”며 부안의 민심이 변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국추련의 대변인은 “작년 휴가철은 관광객은 커녕 가게 문도 열지 못했습니다. 올해도 불경기 때문인지 상황이 어려워요”라고 하며 운을 뗐다. “이대로는 부안의 미래가

특집 | 황희성 기자 | 2004-09-01 00:00

7월 15일부터 23일에 걸쳐 치뤄지는 국제물리올림피아드 기간 동안 이론·실기시험만 실시되는 것은 아니다. 8박 9일 동안 세계 각국에서 참가한 학생들과 단장단이 태권도, 사물놀이, 한의학 등 우리 나라의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도 열린다. 그리고 우리 학교의 방사광가속기 시설과 생명공학연구센터를 방문하는 등 우리 학교의 과학시설들을 각국의 대회 참가자들과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될 예정이다. 이런 공식적인 대회 일정 외에도 이번 2004 국제물리올림피아드에는 몇 가지 특별히 눈에 띄는 점들이 있다. 그 중 첫 번째로 대회 기간 중 매일 영어로 발행되는 뉴스레터의 제작을 포항공대신문사와 카이스트 영자신문사(KAIST Herald)의 학생기자들이 공동으로 맡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제물리올림피아드의 뉴스레터는 대회 기간 중 참가자들에게 대회 일정과 같은 주요 정보들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기획기사 등을 통해 우리나라의 문화를 소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그리고 대회기간 동안 대학생과 대학원생으로 구성된 가이드와 진행요원이 우리 학교 캠퍼스에서 국제물리올림피아드의 일정 진행을 돕게 되는데 진행요원 중에 지난해 대회에 선수단으로 참가하였던 이력을

특집 | 박종훈 기자 | 2004-06-09 00:00

제35회 국제물리올림피아드가 이제 한 달여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대회의 포항 유치 후 지난 2년 동안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들인 노력이 곧 결실을 맺게 된다. 금년은 아테네 올림픽이 열리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안방에서 열리는 전세계 과학영재들의 ‘두뇌 올림픽’인 국제물리올림피아드대회에 대해서는 얼마만큼 관심을 두고 있을까? 세계 각국의 과학영재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최고의 청소년 축제가 첨단과학도시 포항에 소재한 최고의 연구중심대학 포항공대에서 열리게 되어 우리 대학 구성원에게는 그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올해 7월 15일부터 23일까지 우리 학교에서 열리는 제35회 국제물리올림피아드(35th International Physics Olympiad ; IPhO-2004)는 역대 최대 규모인 73개국이 참가할 예정이다. 전 세계의 과학영재들은 대회기간 중 포항공대 기숙사에서 숙식을 하며 대학 체육관에서 이론과 실험경시를 치르는 한편, 포항방사광가속기, 포스코 등 포항 주변의 산업겙墟戟체?탐방과 한국문화체험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하여 국제 친선을 다지게 된다. 따라서 포항공대는 호스트 기관으로서 대학과 구성원이 전 세계에서 참가하는 손님들을 따

특집 | 김승환 / 물리 교수 | 2004-06-09 00:00

이번 해맞이 한마당을 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겠지만 우선은 대체적으로 성공적인 축제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번 축제준비위원회의 단체복이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이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지만 이와는 관계없이 이번 축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우선 지난해 해맞이 한마당부터 계속되어온 부스는 올해도 성공적인 축제를 만들어주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낮부터 열리는 학교의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는 부스와 배달업체 시식회는 학생들이 기숙사 방 밖으로 많이 나와서 축제를 즐기는 데 큰 몫을 했다. 특히 여학생회에서 연 ‘네일 아트(Nail Art)’, ‘대안 생리대 만들기’ 같이 평소에 접할 수 없는 행사를 마련한 부스는 큰 호응을 얻었다.이런 부스와 축제준비위원회에서 마련한 여러 행사들로 이번 축제에 학생들의 참여도는 다른 때에 비해 매우 높았다. 비가 와서 대무대에서 대강당으로 자리를 옮긴 전야제에도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으며 스미스 술래잡기나 물풍선 포트리스와 같은 새로운 행사에도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여 즐겁게 축제를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특히 이번 축제는 학생뿐만이 아닌 학교의 구성원인 교수와 직원,

특집 | 나기원 기자 | 2004-05-19 00:00

지난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비례대표로 출마하여 우리학교 학부생 출신으로는 처음 정계에 입문한 셈이다. 정치인으로서도 특이한 이력이라 느낀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일부에서는 내가 여성, 이공계 출신이라는 이유로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영입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하더라. 하지만 열린우리당에 입당하기 전 개혁당에서 활동하였으며, 이후 열린우리당의 창당 멤버가 되었다. 그리고 20대의 목소리를 정치계에 대변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평소의 생각에 따라 청년실업 문제와 이공계인들이 공유하는 문제점들을 해결할 방안을 찾는 등의 활동을 활발히 한 것이 당내에서 인정받아 비례대표로 출마하게 되었다. 열린우리당의 비례대표로 출마하여 정치적인 활동을 시작하기까지 준비과정을 거쳤고 그것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지금까지 당내에서 하고 있는 일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현재 당내에서 청년중앙위원을 맡고 있다. 이를 통해, 대학생들의 정치참여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보고 학생위원회를 준비 중이며, 대학생의 민감한 현안들이 소모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고 제 목소리를 모을 수 있도록 도우려고 한다. 많은 대학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등록금 인상과 같은 문제의 해결을 돕는 등의 활동도

특집 | 박종훈 기자 | 2004-05-06 00:00

제가 지곡을 떠난지도 어느덧 10년이군요. 온다간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갑작스레 정들었던 우리 학교 교정을 떠나온 지가 말입니다. 그 동안 제 빈자리를 대신해 우리 ‘포항공과대학교’를 이끌어 오신 동료교수, 동문, 직원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우리 학교의 모습도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우선, 개교 당시에 심은 나무들도 한층 더 우거졌습디다. 그리고 교정을 거니는 학생들의 모습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보여 조금 놀라기도 하였습니다.하지만 단 하나 아직도 변함없는 장소가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바로 ‘무은재 기념관’ 앞의 빈 좌대였습니다. 이 빈 좌대를 아직 채우지 못한 것을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저를 포함한 한국 기성 과학자들의 후학들이 혹여 조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책임지는 데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잃은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잠시 해봅니다. 게다가 제 살아 생전엔 듣도보도 못한 ‘이공계 기피현상’이라는 우려스러운 일이 벌어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때문에 대한민국의 선배 과학자로서 그리고 포항공과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서 제 후학들에게 한마디 전하고자 하는 바를 이 편지에 담아 함께 실어보내려고 합니다.포항공대인

특집 | <포항공대신문 기획부> | 2004-04-14 00:00

우리대학의 건립을 통해서 김호길 학장이 한국 과학사에 기여한 바는 다음과 같다. 먼저 재미 한국인과학기술자협회(재미과협)를 통해서 외국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 과학자들을 국내로 불러들여 국내 과학기술연구 및 교육 수준을 한단계 높이게 된다. 생전에 기술 자력과 자립을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최우선 과제로 생각했던 김호길 학장의 뜻에 의해서 외국에서 활동하던 중진교수들을 유치하고 그 중진교수들의 추천에 따라서 젊은 박사급 인력들을 신진교수로 임명해 원할한 연구활동을 가능케 했고, 유학 후 외국에서 연구활동을 계속하던 그전까지의 관행에서 외국수준의 연구시설을 갖추어 유학이 필요없는 대학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실행해 나갔다. 이러한 교수 임용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재미과협이다. 이 단체의 설립배경에는 먼저 60년대 세계적인 추세이던 선진국으로의 과학기술 인력유출(Brain Drain)이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과학기술계에 미국으로의 유학붐이 불었고, 또 원자력 연구원이 설립되면서 국비, IAEA 자금 등을 이용한 유학도 늘게 되어 결과적으로 60년대 말에는 재미 한국과학기술자가 2, 3천명에 달했고, 이들 사이에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특집 | 이현준 기자 | 2004-04-14 00:00

우리학교는 1986년 개교이래 ‘연구중심대학’을 지향해왔다. 연구중심대학이란 첨단 연구시설과 긴밀한 산곀?연 협동을 통해 수준 높은 연구와 교육을 병행함으로써 교육과 연구의 상승효과를 추구하는 대학을 뜻한다.김호길 학장은 외국에서의 유학생활로 연구중심대학의 중요성을 실감하였고, 우리학교의 설립으로 연구중심대학이라는 이념을 한국에서 최초로 구체화하였다. 그 결과 제대로 된 연구분위기를 갖추지 못했던 국내의 다른 대학들에게 경쟁적인 분위기를 유발시켜 국내의 대학들이 연구를 중시하는 체계로 가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연구중심대학이 되기 위해서는 대학원의 설립이 필수이다. 김호길 학장은 유학생활 때 보았던 서구의 유명한 대학들이 학부중심의 대학이 아니라 대학원 중심의 대학이라는 것을 알고 학부의 설립과 동시에 대학원의 설립도 추진하였다. 하지만 당시 관행은 학부 졸업생이 배출된 후에야 대학원 개설을 인가하는 것이었다. 이런 관행이 연구중심대학으로 육성하려는 김호길 학장의 생각에 걸림돌로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 김호길 학장은 학부 1회 신입생 모집 후 1년 뒤인 1988년 3월부터 대학원 교육을 시작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대학원 설립을 추진하였다. 결국 문교부로부터 19

특집 | 구정인 기자 | 2004-04-14 00:00

김호길 박사는 탁월한 과학자였다. 그는 소시 때부터 과학자로 입신하고자 했고, 보통 과학자가 가지지 않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에 자랑할만한 공과대학을 한국에 만들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공과대학을 개선하는 방법이 아니라, 새로운 공과대학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천신만고 끝에 포황공과대학을 설립함으로써, 끝내 그의 꿈을 이루었다. 그는 과학자, 교육자로서의 이름을 천하에 날렸고, 평생의 소원을 성취하였다. 그는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보다도 성공한 과학자일 것이다.김호길 박사는 과학자인 동시에 철두철미한 유자였다. 그는 유교적인 인본주의의 가치관을 가지고 학문을 하고, 일상생활을 했다. 그는 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그 진수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몸소 실천했다. 그는 그가 아니면 엄두를 낼 수 없는 유림의 조직인 박약회(博約會)를 창시하여, 스스로 떠맡은 유자로서의 임무를 다 했다. 이 두 가지 임무 -세계적인 공과대학의 설립과 유교적 인본주의의 가치관의 부흥- 는 그가 스스로 갚기로 작정한 빚이었지, 남이 억지로 맡긴 것은 아니었다. 그는 60세의 짧은 생애를 통하여, 이

특집 | ※조순 전 부총리가 김호길 박사 평전에 실은글을 요 | 2004-04-14 00:00

세월이 흐르는 물 같다는 말이 있다. 누구나 머리칼이 희끗희끗해지는 즈음부터 자주 쓰게 되는 말이지만, 이것은 고(故) 김호길 총장을 떠올리는 나의 머리 속으로 가장 먼저 한 줄기의 서늘한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현해탄을 건너온 그 충격적 비보를 듣고 망연자실하여 눈물을 흘렸던 일이 언젠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난 지가 벌써 10년을 헤아리다니…….내가 고인을 처음 만났던 날은 20년쯤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85년 6월 4일, 효곡 주택단지 안의 포스코 영빈관. 그날 그 자리엔 나와 김호길 박사 내외, 그리고 경남 진주의 연암공전에 있는 그를 포항으로 모셔오기 위해 삼고초려를 감수했던 이대공 포항공대건설본부장이 모여 앉았다.그 무렵의 그는 가슴에 울분을 품은 사람이었다. 물리학계에서 높은 명성을 얻은 학자로서 럭키금성사(현 LG그룹)의 제안을 받아들여 세계적 공과대학을 만들기 위해 30년 가까운 외국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불행하게도 진주의 ‘연암공업전문대학’을 4년제 대학으로 승격시키려던 노력이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인생의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들 중에는 타인의 불행이 뜻하지 않게 나의 행운으로 다가서는 일이 포함되는데, 어쩌면 그

특집 | 박태준 설립이사장 | 2004-04-14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