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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얀 스케치북과 낡아빠진 크레파스 통을 가지고, 매번 똑같은 그림을 그린다. 끝이 눌려 뭉뚝해진 빨간 크레파스로는 한쪽 구석에 동그란 태양을 불어 넣는다. 은은한 주홍빛을 띠는 불가사리는 노란 모래를 점 찍어둔 백사장에 살고 있고, 바닷속에는 초록 크레파스로 이름도 모를 해초를 담는다. 남색 티셔츠를 입은 채 얼굴도 표정도 똑같은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소년의 손에는, 보라색의 조개가 들려있다.어릴 적 그렸던 그림들은 항상 비슷했다. 해안가 끄트머리에는 회색빛의 방파제 위에 빨간 줄무늬를 가진 등대가 서 있고, 끝이 날카로운 검은색 크레파스로는 짱구 눈썹 같은 갈매기를 그렸다. 네모나고 헤진 플라스틱 크레파스 통 안의 여러 가지 것들로 항상 일정한 무엇인가를 뱉어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것은 짧고 뭉툭한 크레파스가 됐고, 또 어떤 것은 새것처럼 길고 날카로운 크레파스 그대로 남았다.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그리고 초록색. 많고 많은 크레파스 중 항상 가장 먼저 닳았던 것은, 파란색 크레파스였다. 날카로운 크레파스 끝이 조금씩 무뎌질 때면, 그것을 덮고 있는 종이 쪼가리를 떼어내고 손에 크레파스를 묻혀가며 계속 그림을 그렸다. 파란색으로는 항상 스케치북의 절

78내림돌 | 이신범 기자 | 2019-04-24 13:33

봄이다. 겨울 속에 웅크렸던 만물들이 기지개를 켜고 깨어난다는 봄이 왔다. 봄을 알리는 노래들이 하나둘씩 발매되고, 우리나라 국민 봄 가요라고 할 수 있는 ‘벚꽃엔딩’이 길거리에 울려 퍼지면 나는 봄이 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사실 봄은 사계절 중 그 어떤 계절보다 중요하다. 토론에서 찬성과 반대 중 어느 쪽에도 의견을 드러내지 않지만, 토론을 이끌어가는 사회자의 역할 같은 계절이다. 애매해 보이지만 여름과 겨울 사이를 부드럽게 이어주고, 그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아니 절대 없을 수 없는 계절이다. 되돌아보면 나는 어렸을 때 봄의 필요성과 역할을 이해하지 못해서 정말 단순히 봄을 싫어했다. 춥거나 덥거나 둘 중 하나만 하면 좋을 텐데 봄은 항상 그 두 가지를 다 해 나를 힘들게 하는 게 싫었고, 애매하게 따뜻한 햇볕과 애매하게 차가운 바람의 이질적인 조합이 너무 거슬렸다. 그런데 요즘 그렇게 싫어했던 봄이 그립다. 학교에서 벚꽃이 필 때쯤 중간고사를 보고, 봄이 가장 바쁜 학기 초라 봄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봄이라는 계절 자체가 지구 온난화로 인해 짧아지고, 온 세상을 뿌옇

78내림돌 | 김영현 기자 | 2019-03-29 16:47

나는 바쁘게 살고 있다. 방학 때마다 동아리 합숙으로 남아 공부하는가 하면, 때로는 훌쩍 여행을 떠나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학기 중에도 이것저것 다양한 활동과 대회에 참가하며 새로운 경험을 쌓아나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학업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살아왔다. 태생적으로 가만히 누워서 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면서,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먼저, 나는 아직 젊다. 해보고 싶은 일이 너무나도 많다. 때로는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벌써 1학년이 끝났다며 이제 늙었다고 하소연을 하지만, 아직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안다. 아직 하계 인턴십 프로그램이나 단기유학과 같이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프로그램도 다 참여하지 못했다.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방에 틀어박혀 있기에는, 젊음으로 견뎌낼 수 있는 힘든 경험들을 놓칠 것만 같다. 그리고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은 미래를 미처 다 설계하지 못한 내게 아주 훌륭한 영양분이 되리라는 확신이 있다.또한, 아직 내가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도 많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가 제일 잘난 줄만 알았다. 하지만 우리대학에 온 뒤 나보다 한발 앞서 나간 선배들을 보면서, 내가 아직 부족한 부

78내림돌 | 국현호 기자 | 2019-02-28 03:01

얼마 전 사촌 동생을 만났다. 심심하면 뛰어다니며 사촌 형들을 쫓아다니고, 부모님 휴대전화로 유튜브를 보다가 그만 보라면 울상 짓는 평범한 유치원생이다. 우리도 어렸을 때 지치지 않고 뛰어다니며 부모님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땐 유튜브가 아니라 비디오테이프를 봤다. 눈치챘겠지만 지금 유치원생들과 우리는 이미 우리와 부모님 세대만큼 달라졌다.주5일제가 부분적으로 적용되면서 2주에 한 번 학교를 쉬던 시절도 있었다. 토요일마다 달력을 보며 오늘이 가는 토요일인지 노는 토요일인지 확인하는 게 일상이었다. ‘갈토’에는 학급 임원 부모님께서 사주신 ‘콜팝’을 먹었던 기억, 학교 마치고 다 함께 친구 생일파티에 갔던 기억이 난다. 다섯 번째 주 토요일이 최악이었다. 다음 주 토요일까지 두 주 연속으로 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영어를 카세트테이프와 책으로 배웠다. 책은 지금까지 그대로지만, 카세트테이프는 CD가 됐고, 마침내 태블릿 PC가 됐다. 되감기와 빨리 감기 버튼을 너무 많이 눌러 고장 난 녹음기도 여러 개였다. 녹음테이프가 늘어나 녹음기에 걸리면 테이프를 빼고 연필을 구멍에 끼워 열심히 돌렸던 기억이 난다. 되감기와 빨리 감기로 다시 들고

78내림돌 | 김성민 기자 | 2019-02-11 23:56

풀 향기가 좋다고들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아니다.어릴 적 숲에만 들어서면 코를 찌르는 풀 향은 울렁거렸고, 그 향기롭다는 장미 향은 숨이 막혔다. 피톤치드가 나온다는 편백 베개의 향은 기침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이걸 향기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대체 무엇이, 어디가 좋은 것일까.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풀 향기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된 건 불과 얼마 전이다. 잔디 깎기가 한창인 가을날 폭풍의 언덕을 가로질러 봤는가? 냄새가 지독하다. 잔디가 베어지며 수액이 흘러나온 탓이다. 끔찍했다. 발밑의 잔디들은 처참하게 목이 베어진 채 꼿꼿이 서 있었고, 베어진 머리는 그 옆에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고흐의 말이 떠올랐다. “난 밀밭에서 죽음을 봤어. 그들이 베어내는 것이 인류라면 어떨까” 보이지 않는 피로 얼룩진 폭풍의 언덕을 걸으며 생각했다. 이 향 어디서 많이 맡았는데. 풀 향이다. 그제야 풀 향기의 정체를 알게 됐다. 그건 죽음의 향이다. 우리가 좋다며 산길로 뛰어 들어갈 때 발밑의 이름 모를 풀과 곤충들이 내지르는 하나의 비명이다. 나무들이 눈물 대신 수액을 흘리며 부르는 장송곡이다. 꺾인 꽃다발의 향기가

78내림돌 | 권재영 기자 | 2019-01-05 01:29

길게 머리를 땋던 나무들은 잠시 새 단장을 하더니, 어느새 사람들의 발자국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지퍼를 끝까지 잡아 올리고, 바람은 그 좁은 틈새를 비집어온다. 동틀 때면 지저귀던 새들도 하나둘 목소리가 잦아들고 있다. 어디 갔나 했더니 남쪽으로 떠나고 있다. 어느덧 겨울이 다가온다. 상춘(賞春)도 있는데 상동(賞冬)이라고 못할까. 몇 자 적어 본다.뉴스 속 앵커는 담담하게 눈 소식을 알린다. 서울에는 벌써 첫눈이 내렸다. 그것도 발목까지 쌓일 정도로 왔다고 한다. 달력을 보니 11월이었다. 딱히 눈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왠지 첫눈을 너무 빨리 뺏긴 것 같아 억울하다. 포항은 서릿발만 칠 뿐 눈이 쌓이지는 않았다. 올해 안으로 포항에 눈사람이 빚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과메기는 최근에 먹어봤다. 구룡포가 유명하다는데, 생선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감칠맛 나게 생겨서 한번 먹어보고 싶었다. 청어나 꽁치를 내걸어 얼리고 녹이기를 반복해서 만든다고 한다. 그냥 얼고 녹기만 반복했는데 맛있어진다니 참으로 신기하다. 한편으로는 청어랑 꽁치가 무슨 죄가 있기에 그런 수모를 겪나 불쌍하다. 맛있는 것도 죄라면 할 말이 없다.이제 종강도 얼마 안 남

78내림돌 | 국현호 기자 | 2018-12-12 14:20

1년 전 딱 이때쯤이었다. 그날 나는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두고 예비소집이 열리고 있는 모교 체육관에 있었다. 안내 책자를 받고 수능에 대한 각종 유의사항을 들으며 내일의 자유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진이 났다. 처음에는 당황했다. 체육관이 흔들리면서 울리는 소리가 흔들림보다 더 크게 느껴져서 3초 동안은 지진인 줄도 몰랐다. 잠시 어리둥절하고 나서 흔들림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앉았던 플라스틱 의자로 머리를 감쌌다. 진동이 멈추자 운동장으로 나가려는 학생들이 문마다 가득했다.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의 휴대전화에서는 연신 긴급재난문자 알림이 울렸다. 다들 문자 보내고 전화하느라 기지국도 먹통이었다. 운동장에 있을 때도 여진은 계속 이어졌다. 여진이 잠잠해지자 하교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수능이 미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수능이 그대로 시행될 수도 있었기에 함께 수능대박을 다짐하고 헤어졌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포항을 빠져나가고자 하는 차들로 꽉 막혔다. 걷는 것이 더 빠를 정도였다. ‘이렇게 큰 지진이 났는데 수능을 그대로 치겠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혹시 몰라 고사장과 고사실 위치를 확인했다. 집 앞에 도

78내림돌 | 김성민 기자 | 2018-11-29 11:25

나는 남들과 같이하는 것보다는 혼자 하는 것을 즐기고 ‘고독’의 시간이 꼭 필요한 내성적인 성격이다. 어렸을 때는 이런 내성적인 성격이 싫어서 일부러 다른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고 많은 도전을 했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성격을 어느 정도 바꾼 것 같았으나 고등학교 때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아직도 나의 성격이 내성적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친구들이나 룸메이트가 불편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숙사 특성상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내 성격이 이상한 건 아닐까?’라고도 많이 생각했었다. 하지만 대학교 입학 전 한 TED 강연을 듣고 나는 내 성격을 이해하고 좋아하게 됐으며 굳이 고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 강연은 ‘콰이어트’의 저자 수잔 케인의 ‘내성적인 사람들의 힘’이라는 제목의 강연이었는데 내성적인 성격에 대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을 꼬집고 있었다. 우리 사회는 외향적인 성격을 칭송하며, 학교나 직장에서는 개인보다는 팀으로서의 협력을 중요시하고 사교적인 환경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연사는 그런 사회적 통념은 옳지 못하다고 하며 내향적인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78내림돌 | 김영현 기자 | 2018-11-07 14:59

당장 앞에 있는 공부보다 하염없이 노는 것만 좋아했던 시절, 일과를 마치고 하는 일이라곤 친구들과 컴퓨터 게임을 하며 밤을 새우는 것이 전부였던 내가 있었다.나무들이 흩날리는 소리와 함께 불어오던 산바람이 초록빛 향기를 머금은 듯 여름의 시작을 알리던 그날에도,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어김없이 풀이 다 죽은 카펫 위 구석진 어느 곳에다가 책가방을 내팽개치고 컴퓨터를 켰다.10년을 함께 보낸 강아지를 떠나보내고, 키우는 애완동물이라곤 초등학교 운동회를 마치고 500원을 주고 사 왔던 노란 햇병아리, 혹은 자그마한 햄스터가 전부였던 우리 집. 그날은, ‘너’라는 존재가 조그마한 공간을 차지하기 시작한 날이었다.짙은 아이보리색 털에, 검고 부드러운 귀, 그리고 유난히 파란 눈을 가진 너는, 생긴 것과 다르게 꽤 큰 몸집을 갖고 있었다.고양이란 족속은 원래 그런가 보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좀처럼 오지 않고, 생각보다 큰 덩치에 혹여나 먼저 다가가면 할퀼까 어찌나 무서웠던지. 그렇게 몇 달을 서로 어색한 사이로 보냈다. 어느 날 침대에 누워있던 내 옆에 불쑥 네가 다가와서 누웠다. 아마도 이전까지의 행동을 봤을 때, 너는 내가 자는 줄 알고 조심스레 다가

78내림돌 | 이신범 기자 | 2018-10-10 23:54

버리지 못하고 계속 소유하고 있는 물건은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을 것이다. 물건 한두 개를 오랜 시간 소장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특정 종류의 물품을 수집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각종 홍보용 전단, 즉 리플렛을 모으고 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비치된 책자에서부터 영화 및 공연 포스터까지 그 대상은 다양하다. 어떤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면 그 작품의 포스터는 물론 내가 보지 않은 공연의 것까지 몇 장씩 가져온다. 심하지 않은 수준의 집착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국내의 다양한 장소를 방문하며 리플렛을 모았듯, 해외여행을 가서도 리플렛에 대한 수집욕은 계속됐다. 외국어로 적힌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책자 비슷한 게 보이기만 하면 일단 집어 들고 봤다. 결과적으로 읽지도 못하는 생소한 언어의 리플렛이 상당히 쌓이게 됐다. 외국에서 모은 리플렛들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영어 공부에 큰 동기를 부여해 주기도 했다. 지금 소유하고 있는 책자는 물론이고 앞으로 다양한 나라를 여행하며 모으게 될 타국의 리플렛을 꼭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행여 내가 모은 리플렛을 전부 읽어 보지 못한다고 해도 괜

78내림돌 | 권재영 기자 | 2018-09-19 18:53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시포스는 교활하고 약은 꾀로 신들을 우롱해 영원히 산 정상으로 돌을 밀어 올려야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 그 돌은 정상에 다다랐을 때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때문에 시시포스의 삶은 끝없는 노동이었다. 나는 ‘목적 없는 노동의 반복’을 가장 무서운 형벌이라 생각했을 그리스 신들, 그리고 그 신들의 뜻대로 결국 일의 목적조차 흩어버리는 ‘권태’에 시달렸을 시시포스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뭔가 모를 낯익음에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3년의 대학 생활 한 가운데서 휴학을 결정하고 되돌아본 나는 시시포스와 닮아있었다. 쏟아지는 과제, 반복적인 일상을 매일같이 꼭대기로 굴려나가는 기계로 기억된다. 막상 이것저것 새로운 일을 시작해보다가도 이내 현실을 마주할 때면 느껴지는 묵직한 권태로움이 나는 너무나도 괴로웠고, 뭘 해도 사라지지 않는 무기력함은 이제 그만 뱉어버리고 싶은 단물 빠진 껌으로 느껴졌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설렘이었던 대학생활을 한순간에 소위 ‘노잼’으로 바꿔버리는 ‘권태’는 그래서 무서운 것이었다.1960년대 정신신체의학의 선구자였던 스튜어트 울프는 ‘시시포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는 시시포스 콤플렉

78내림돌 | 공환석 기자 | 2018-05-30 21:53

나는 어릴 때부터 군대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웠다. 어른들이 장난스럽게 던지는 군대 관련 농담 한마디에도 기분이 종일 울적해지곤 했다. 언젠지 모를 정도로 옛날부터 내 마음 한편에는 군대를 향한 강한 거부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해외 도피 관련 병역 기피에 대해 알아보다가 유승준 방지법을 발견하고 실망했던 어릴 적의 내 모습은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랬던 내가 요즘은 군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군대는 가끔 대학생에게 도피처가 되곤 한다. 실패한 인간관계 때문에 친구들에게서 도망칠 수도, 망쳐버린 전공 학점 때문에 학교로부터 도망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대한민국 육군이 되고 싶은 것이다.내가 이렇게 태도를 바꾼 이유는 군대에 대한 나의 인식이 크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내 주변 군필자들이 다들 요즘 군대 분위기가 좋다고 한다. 그리고 국방부에서 제작한 육군 웹 드라마들을 시청해보면 군 생활이 오히려 재밌어 보이기까지 한다. 군대에 가면 훈련과 작업 등으로 생활은 지금보다 훨씬 힘들겠지만, 바닥을 치는 체력과 잃어버린 지 오래인 건강은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에 입학하고부터 줄곧

78내림돌 | 장호중 기자 | 2018-05-10 15:25

중학교 때 우리 집에는 완성된 루빅 큐브 하나가 있었다. 누가 샀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가족 중에 큐브를 맞출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큐브는 거실 텔레비전 앞에 놓여 장식용 신세를 졌다. 그러다 집에 나이 어린 손님이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큐브가 신기한지 이리저리 가지고 놀다 그만 큐브를 섞어 버렸다. 이 때문에 텔레비전 앞에는 섞인 큐브가 놓이게 됐다. 나는 완성된 큐브가 보고 싶었다. 단지 섞인 큐브보단 완성된 큐브가 낫다는 생각에 텔레비전 앞에 앉아 큐브를 잡았다. 하지만, 큐브는 몇 번 돌린다고 쉽게 맞춰지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이를 맞추기 위해 큐브에 붙어 있는 스티커를 모두 떼서 원래 자리에 다시 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왠지 모를 회의감이 몰려왔다. 무엇보다 편법을 써서 큐브를 완성했다고 합리화하는 내가 싫었다.나는 큐브를 들고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큐브를 다시 섞은 뒤 이를 맞추기 위한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큐브는 맞추기 위한 공식이 있었고, 나는 그 공식을 다 외울 때까지 방 안에서 큐브와의 사투를 벌였다. 내가 모르던 새로운 지식을 알아가는 과정은 묘하게 짜릿했으며, 어느덧 완성된 큐브를 손에 쥐기까지 7시간이 흘러

78내림돌 | 황성진 기자 | 2018-04-18 16:55

나는 뭐든지 기록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달력에 매일 할 일을 빼곡히 정리해놓는 것은 기본이고, 몇 년째 수업 필기 자료와 과제를 빠짐없이 보관하고 있다. 책, 영화, 공연, 전시회를 보고 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감상문을 쓰고, 여행을 가면 카메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을 찍기에 바쁘다. 내가 이렇게 기록에 대한 강박을 느끼기 시작한 계기는 꽤 단순하다. 나의 경험, 생각 따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잊힌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웠다. 과거의 내가 무엇을 보고 듣고 느꼈는지를 영원히 기억에 남기고 싶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꼬박꼬박 그것들을 기록하는 것뿐이었다.그런 나의 보물 1호는 언제나 일기장이었다. 매일매일 나의 글씨로 채워나간 일기장들을 펼쳐보면, 과거의 내가 했던 사소한 생각들이 가득하다. 대수롭지 않아서 더 좋다. “매점에 새로 들어온 과일 음료수가 정말 맛있다”, “밤에 산책하다가 달을 봤는데 유난히 밝았다” 같이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거르지도, 고치지도 않고 적어댔다. 심심할 땐 그림도 자주 그렸고, 자습시간에 친구들이 보내온 쪽지 조각들을 구석에 붙이기도 했다.그 무수한 티끌 같은 기록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나

78내림돌 | 박민해 기자 | 2018-03-28 13:14